승부사 츠다릴리프, 스토퍼 등의 용어로 표현되는 구원 투수들은 절대절명의 위기를 진압하는 특성 때문에 흔히 ‘소방수’에 비유됩니다. 그리고 만약 자주 구원에 실패할 경우 ‘방화범’이라는 오명이 붙게 되곤 합니다. 하지만 츠다가 ‘불꽃의 스토퍼’라고 불리게 된 이유는 불을 지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고있는 불에 더 강한 불꽃을 끼얹어 제압했기 때문입니다.
마무리 투수들의 승부구는 대부분 변화구입니다. 현대에 들어 타자들의 타격기술이 점점 향상되자 타자들의 타이밍을 뺏는 변화구는 투수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지요 사사키에게는 포크볼이 있었고 선동열에게는 슬라이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츠다에게는 직구 하나 뿐이었습니다. 사내답게 싸우기 위해 유인구 하나 없이 언제나 150km의 직구 승부만을 고집했던 츠다는 진정한 승부사였습니다.

그의 직구는 말 그대로 불을 뿜었고 타자들과 심판들은 쉴새 없이 꽂아대는 그의 직구에 질려버렸습니다. 인코스를 노리고 있는 타자들에게는 머리에 바짝 붙인 빈볼로 응징했고 전타석에 홈런을 때린 선수에겐 똑 같은 코스의 직구로 삼진을 잡아내 보복했습니다. 츠다의 모토는 ‘칠테면 쳐봐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츠다의 전성기 시절, 상대 팀들에서는 ‘컨디션 좋은 날 츠다의 공은 하느님도 칠 수 없다’ 라는 말이 돌기도 했습니다.
신인시절, 츠다는 포수였던 다쓰가와가 주문했던 변화구를 던지다 끝내기 홈런을 맞은 적이 있었습니다. 시합 후 흐느끼는 츠다에게 다가간 다쓰가와는 말했습니다. ‘이제 잔재주는 그만두자. 앞으로는 직구 하나만 가지고 결사적으로 한번 해보자’ 이 말은 그 후 츠다의 야구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츠다의 통산 성적은 49승 90세이브, 방어율 3.31입니다. 선동열 선수가 일본에서 단 3년 만에 90세이브가 넘는 기록을 세운 것과 비교하면 그다지 눈에 띄는 기록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마무리로 뛴 햇수가 86년부터 89년까지 단 4년뿐이라는 것과, 요즘처럼 투수 분업화가 되어 있지 않은 시대의 기록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 기록은 대단히 뛰어난 성적입니다. 그의 기록은 일본 프로야구 통산 16위에 올라가 있고, 리스트에 있는 다른 투수들은 대부분 전업 마무리로 10년 가까이 뛴 선수들입니다.
고난의 시작1990년 시즌이 시작되기 전, 히로시마의 팬들이 츠다에게 거는 기대는 절대적이었습니다.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것 같은 그의 모습에서 팬들은 힘을 얻었고, 그의 불꽃 같은 직구를 보며 어린이들은 프로야구 선수가 된 자신의 미래를 상상했습니다. 당시 츠다를 우상으로 삼던 아이들 중 하나가 세이부의 괴물 투수, 마쓰자카 (松坂)였습니다. 그 해 드래프트 1번으로 들어온 거물 신인이자 미래의 에이스, 사사오카 (佐佐岡)도 츠다의 팬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즌이 시작하고 단 네경기 만에, 츠다는 오른쪽 어깨에 이상을 느끼고 강판 당합니다. 그리고 부상이 상상외로 심각하다는 것을 발견하곤 본격적인 재활 과정에 들어가지만, 재활 중인 8월에 다시 한번 인대를 손상해 결국 90년 시즌 내 복귀는 실패했습니다. 츠다의 자리인 마무리에는 츠다를 동경하던 신인 사사오카가 투입되어 전천후로 17세이브를 기록합니다.
츠다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된 팬들은 실망했으나, 그의 복귀를 의심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츠다라면, 사나이 츠다라면, 이런 부상쯤은 툭툭 털고 일어날 것이 너무나 당연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늘 그래왔으니 말입니다. ‘괴로울 때도 도망가지 않는다, 언제나 베스트로 맞선다.’라는 그의 좌우명은,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오프 시즌동안, 츠다는 죽자 사자 재활에 매달렸고 2월쯤에는 이미 부상 전의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운명의 91년 시즌 직전, 팬들과 동료들, 그리고 츠다 자신도 재기를 의심할 나위 없이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참으로 얄궂었습니다.
운명의 91시즌91시즌이 시작되기 전, 히로시마의 미래는 장미빛이었습니다. 키타벳부, 사사오카, 오노, 가와구치(川口)는 당대 최고 철벽투수진의 근간이었고 타격에서도 유격수 노무라(野村)를 선두로 에토(江藤), 마에다(前田), 오가타 등의 젊은 피들이 은퇴한 카프의 대들보 들인 야마모토 고지와 기누가사 사치오가 빠져나간 자리를 성공적으로 메꾸어 주리라고 기대되고 있었습니다.
(주1) 여기에 전년도 전력 외였던 츠다가 돌아온다면, 6년만의 우승도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장미빛으로 가득찬 91시즌이 시작되었고, 개막전 부터 츠다는 투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1점차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동점을 만들어주며 1이닝을 던진 후 마운드에서 내려옵니다. 이때만 해도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오랜만에 등판을 해서 컨트롤이 제대로 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며 위안을 합니다. 다음 경기에서는 수호신의 모습을 보여주겠지.. 하며 말입니다.
하지만 이틀 후 등판한 츠다는 결코 그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대 거인전, 키타벳부와 요시다의 팽팽한 투수전은 7회에 가서야 균형이 깨지고 2-1로 리드하고 있는 상황에서 츠다가 등판합니다. 당연히 관중석에서는 이제 이겼다는 탄성이 터져나왔습니다. 그러나.. 츠다는 그 탄성에 보답하지 못합니다. 사구와 안타를 연이어 맞은 츠다는 아웃카운트 하나 잡지 못하고 3실점하며 오노에게 공을 넘기고 패전투수가 됩니다. 벤치를 향한 츠다에게 야유와 비난이 쏟아지자 츠다는 입술을 깨문 채 머리를 숙이고 벤치로 들어갑니다.
이날 츠다는, 자신의 몸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전년도에는 부상당한 어깨 때문이려니 하고 생각했지만, 진정한 문제는 그가 원하는 대로 공이 뿌려지지 않는 다는 것이었습니다. 영문을 모르고 병원에 가서 정밀검진을 받은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뇌종양, 그것도 이미 손을 쓰기 힘든 말기였습니다.
너무나도 쇼킹한 뉴스에 구단과 츠다의 아내 아키요는 경악했고, 일단 츠다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은 상태에서 수술을 받게 하도록 하자는데 동의합니다. 병명을 모르고 수술실에 들어가는 츠다는 그의 인생 처음으로 ‘무섭다’는 말을 연발하기 시작합니다. 대수술은 일단 성공적이었으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방사선 치료와 항암 치료를 포함한 긴 투병생활을 시작합니다.
투병 생활심한 두통으로 몸부림치던 츠다에게 더욱 두려웠던 것은, 그 자신의 병명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병원에서 그에게 해준 말은 수두염의 일종이라는 어중간한 답변뿐. 아무리 아내를 다그치고 의사에게 매달려도 그 이상의 답변은 얻을 수 없었습니다. 수두염 따위로는 이렇게 아플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고 병세는 악화되기 시작하여 결국 재수술을 해야만 했습니다.
재수술의 결과는 더욱 심한 통증이었습니다. 견디기 힘든 통증에 미친 듯이 괴로워하던 츠다는 3일이 지나서야 눈을 붙일 수 있었고 잠에서 깨어난 츠다는 ‘무엇 때문에 나만 이렇게 아파야 하는 것인가’ 라고 외치며 그의 아내 아키요의 품에 안겨, 생애 처음으로 펑펑 울었습니다. 너무나 괴로워하던 츠다를 보다 못한 그의 아내 아키요는 식이 요법을 사용해 보기로 마음을 먹고 주치의를 방문, 항암제나 방사선 치료를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전달합니다.
6월 12일, 마침내 츠다는 병원에서 퇴원하였고 집에서 통원 치료와 식이 요법을 병행하며 치료를 해나갑니다. 불안에 휩싸인 츠다는 도대체 자신의 병명이 뭐냐며 아내를 다그쳤고, 그의 아내 아키요는 2주일이 지난 뒤, 마침내 그의 병명을 알려주게 됩니다.
뇌종양. 불치의 병. 말기. 엄청난 쇼크를 받은 츠다는 ‘이제 나는 죽는 것인가?’ 라고 뇌까리며 아이와 같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키요는 같이 눈물을 흘리며 충격을 받은 츠다를 격려합니다. 아내의 헌신적인 간호에 감동을 받은 츠다는 자신의 행동을 진심으로 사과하고 그때까지 그를 지탱해왔던 불굴의 투지로, 병마와 싸울 것을 다짐합니다. 결사적으로 식이 요법에 매달리던 츠다의 두통은 가라앉는 듯 했으나 7월 19일, 갑자기 상태가 급변합니다.
중태에 빠진 츠다는 병원에 입원합니다. 하지만 고비를 넘기자, 식이요법의 효과가 발휘되어서 였는지 기적적인 회복을 보입니다. 9월 17일, 믿어지지 않게 도움 없이 혼자 앉게 된 그는 다음날 침대에서 일어났고 그 다음날에는 걷기 시작했습니다. 히로시마 카프가 우승이 결정된 날, 그는 어린아이처럼 손뼉을 치며 기뻐했습니다.
같이 싸운다, 츠다!츠다의 병명이 알려진 후, 히로시마 선수단은 초상집 분위기나 다름없었습니다. 히로시마에서 츠다의 존재는 단순한 마무리 투수 이상이었습니다. 선발투수 들은 그를 보며 7회까지만 버티자는 생각을 했고, 타자들은 그와 같은 팀이라는 것을 하늘에 감사했습니다. 신인들은 그를 우러러 보았으며 베테랑들은 그를 믿었습니다. 츠다가 투병 중이란 것을 알게 되자 팀원들은 그와 같이 싸울 것을 다짐했습니다.
츠다의 빈자리에는 츠다와 제일 친한 투수였던 오노가 들어갔습니다. 마무리 투수를 맡게 된 오노는 히로시마 시민구장 불팬 내, 츠다가 주로 서있던 자리에 플레이트를 걸어놓았고, 등판할 시기가 되면 꼭 그 플레이트에 손을 대고 난 후에 경기에 나갔습니다. 츠다를 동경하던 사사오카는 엄청난 투지를 보이며 사와무라상을 받아 그 해 최고의 투수가 되었습니다. 츠다와 어깨를 마주하며 던지던 키타벳부와 가와구치는 선발진을 맡아가며 팀을 이끌어 나갔고, 타선에서는 츠다와 생사고락을 같이한 다쓰가와가 눈물을 흘리며 뛰고 있었습니다.
시즌 종반, 마침내 주니치를 따라잡은 히로시마는 홈구장에서 역전 우승을 달성합니다. 감독의 헹가레를 끝낸 후, 그라운드에서 벌어진 우승 축하연에서 다쓰가와는 눈물을 머금고 외칩니다. ‘츠다… 해냈어!’ 곧 모든 선수들이 다쓰가와를 따라 외치기 시작했고 팀 전원은 하늘을 향해 손을 들며 츠다에게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분발해줘, 츠다!’
일본시리즈에서, 그 없이 세이부와 싸우고 있는 히로시마를 보던 츠다는 아내에게 말합니다. ‘여보, 감독이나 코치에게 욕을 먹고, 관중들에게 어떠한 야유와 비난을 받아도 좋으니, 한번만, 다시 한번만 마운드에 설 수 있으면 좋겠어.’
싸움의 끝11월 6일, 히로시마 구단은 충격적인 발표를 합니다.
-히로시마 카프 구단은 마무리 투수 츠다 츠네미 선수를 방출합니다-
모든 스포츠 신문들은 다음날 1면 톱기사로 불꽃의 마무리 투수의 은퇴를 발표했고 츠다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곧 그의 인생을 좌우한 오기와 투지가 불타올랐고, 단순히 ‘살아 남는다’였던 그의 목표는 ‘연봉따윈 필요없다. 다시 한번 히로시마의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서고 싶다’로 바뀌었습니다.
긴 겨울이 지나고, 92년 새해가 되자, 츠다는 마침내 그토록 그립던 공을 잡습니다. 그의 세살난 아들의 캐치볼 상대가 된 츠다는 공을 받게 되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와인드업을 하고 공을 던져버립니다. 아들의 옆으로 날아간 것은, 놀라운 속도의 강속구였습니다. 벙쩌버린 아들, 경악한 츠다, 그리고 누구보다 기쁨에 찬 그의 아내 아키요. 이젠 정말 할 수 있다고 마음먹은 츠다는 본격적으로 트레이닝에 들어갑니다.
복귀를 목표로 트레이닝을 하던 츠다에게 이상이 생긴 것은 6월. 그의 말수가 감소하고, 얼굴이 고통에 차기 시작했습니다. 기억력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8월에는 다시 병원에 입원해야 했습니다. 9월이 되자 말을 할 수 없게 되었고 10월에는 의식을 잃었습니다. 식물인간 상태로 7개월을 버텼으나 다음해 5월 호흡정지. 7월 19일, 생명유지 장치에 힘입어 살아있던 그에게 아내 아키요가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여보, 이제 편해지셔도 되요. 그 동안 노력해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7월 20일 오후 2시 45분. 츠다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향연 32세였습니다.
그 후…천재는 요절한다는 말이 사실이었을까요? 너무나도 일찍 세상을 떠난 츠다를 보며 다쓰가와와 오노를 비롯한 히로시마 팀원들은 오열했습니다. 팬들은 눈물을 흘렸고, 앞으로는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을, 그런 선수가 떠나갔다는 것에 대해 야구계 전체는 슬픔에 빠졌습니다.
그가 죽기 전인 93년 4월, 그의 고향이었던 신난요시는 츠다를 신난요시 시민 영예상 1호로 발탁하고, 그를 기리기 위한 작업을 착수합니다. 시청 로비 한쪽에는 지금도 츠다 선수가 입고 있던 유니폼과 글러브, 스파이크등을 영구 보존하고 있습니다. 츠다의 모교였던 와다 중학교에서는 야마모토 고지 감독의 친필이 담긴 ‘직구인생’이라는 기념비가 만들어 졌습니다.

그의 비운의 삶은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을 울렸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더 기억에 남게 됩니다. 그의 아내가 투병 당시 쓰던 일기를 모아서 출판한 ‘최후의 스트라이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NHK에서는 ‘다시 한번 던지고 싶었다’라는 제목으로 그의 삶을 재 조명했습니다. 그의 7번째 기일 직후인 2000년 7월 28일에는 후지TV에서 ‘최후의 스트라이크 - 불꽃의 스토퍼 츠다 츠네미의 사랑과 죽음을 응시한 직구인생’이라는 제목으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히로시마의 팬들은 아직도 츠다를 기억합니다. 히로시마 카프 게시판에 무명으로 이런 글이 올라와 있습니다.
츠다의 14번이 영구 결번이 아닌 것은,천국에 올라간 츠다를 신격화하는 대신,그 영혼을 모두에게 계승하기 위해서 입니다. 히로시마 시민 구장이 돔구장이 되지 않는 이유는,츠다가 천국에서 언제라도 시합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마무리 투수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분야 중 어느 면에서도 츠다는 최고가 아니었습니다. 직구 스피드에서는 스즈키보다 못했고 공의 무거움에서는 야마구치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천재성에는 에나츠를 능가하지 못했고 우시지마처럼 다양한 변화구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실적으로는 가쿠 겐지에게 밀리고 기록에서는 사사키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안정감에서는 선동열 뒤에 있고 전천후성으로는 오노와 경쟁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츠다에게는 이 모든 선수들을 능가했던 열정이 있었고 그 누구와도 정면승부를 할 수 있던 배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어떠한 다양한 변화구도 제압할 수 있는 불꽃의 직구가 있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야구 경기를 한다면, 그리고 그 경기가 1점차 9회 말 2사 만루까지 갔다면, 전 망설임 없이 츠다를 선택할 것입니다. 물론 실패할 수도 있을 것이고, 사사키나 선동열을 믿어보는 것이 더 성공확률이 높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츠다라면, 다른 ‘투구기계’ 들이 아닌 ‘사나이 츠다’ 라면, 적어도 내 목숨을 한번 걸어 볼만한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에필로그2000년 7월 20일. 히로시마 시민구장에서는 카프의 홈 경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습니다. 경기 시작 전, 시구식을 준비하는 구단 직원들의 얼굴은 경직되어 있었고, 벤치의 다쓰가와 감독과 카프 선수들의 눈은 떨리고 있었습니다. 영문을 몰라 하는 관중들을 향해 스피커에서는 난데없이 선수교체의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히로시마 카프 투수 교체입니다. 투수, 츠다. 등번호, 14…’
경악하는 관중들. 츠다의 기일에 이 무슨 불경스러운 일인가라고 외치던 관중들의 눈에 불펜에서 힘차게 뛰어나오는 한 소년의 모습이 들어왔습니다. 그의 빨간 카프 유니폼 등에는 분명 츠다. 14번이라는 글씨가 커다랗게 쓰여있었습니다.
상황을 짐작한 관중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마운드에 서있는 소년은 이제 열한살이 된 츠다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늠름한 모습의 소년은 멋진 와인드업을 한 후 포수의 글러브를 향해, 아버지가 그토록 던지고 싶어했던 강속구를 던졌습니다.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카프의 팬들은 믿고 있습니다.
카.프.매.니.아. 뽀레
타이틀
82 신인왕, 83 최고승률(.750), 89 최우수구원(40sp)
(주1)
91년도 히로시마 카프의 투수진은 역대 카프의 투수진중 손꼽힐 정도로 강하다는 것이 대다수의 의견입니다. 2년차로 완벽한 모습을 보이며 MVP, 사와무라상, 투수부문 베스트나인, 다승, 방어율 타이틀을 따낸 사사오카 신지를 필두로 승률 타이틀의 키타벳부, 구원 타이틀의 오노, 탈삼진 타이틀의 가와구치 등 센트럴리그 투수부문 타이틀을 카프 투수진이 독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