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1986년 10월 12일. 센트럴리그 우승까지 1승만을 남겨두고 있던 히로시마는 메이지 진구 구장에서 야쿠르트와의 원정 경기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1회에 나가시마 (長島淸幸)의 만루 홈런이 터지는 등, 시합은 완전히 히로시마의 페이스.선발 투수인 히로시마의 에이스 키타벳부 (北別府學)도 쾌조의 투구를 보이며 8대3으로 리드하고 있던 상황에서 9회말 야쿠르트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이 때 덕아웃에서 키타벳부는 글러브를 챙겨주는 감독에게 말을 꺼냅니다. ‘교체해 주십시오.’ 의아해 하는 아난(阿南)감독에게 설명하는 키타벳부. ‘츠네를 헹가래 투수로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감독. 부상에 시달리던 시즌들을 극복하고,팔이 빠져라 던지면서도 피곤한 척 한번 하지 않았던 츠다의 모습을 선수단 모두가 알고 있었기에, 반대 의견을 내세우는 자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
‘구원투수 14번, 츠다 츠네미’ 장내 아나운서의 방송이 이어지자 관중들은 열광하기 시작합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타자를 질려버리게 할 정도로 윽박지르는 직구승부. 몇 개인가 직구가 연달아 들어왔고 우승을 결정짓는 마지막 직구가 포수 미트를 향해 돌진했습니다. 그 불을 뿜는 직구는 외곽으로 크게 벗어나는 볼. 하지만 질려버린 주심은 엉겁결에 손을 들어버리고 맙니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눈물을 흘리며 뛰어나온 포수 다쓰가와(達川光男) 의 품에 안긴 츠다는 꿈 같은 86년 시즌을 마칩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는 전설이 되었습니다.
비운의 선수
우리나라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비운의 선수는 누구일까요? 프로야구 원년을 불태운 후 잦은 부상으로 끝까지 원래의 실력을 찾지 못했던 불사조 박철순, 투타겸업에 따른 혹사와 부상으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져버린 우리나라 첫 아이돌 스포츠 스타 박노준, 18승으로 신인왕을 따내고 화려한 경력을 막 시작하려는 참에 교통사고로 인해 투수의 꿈을 접어야 했던 김건우, 앞으로 10년은 팀을 책임질 대들보로 여겨지다 급작스러운 위암으로 사망한 김상진, 만개하는 듯 하다가 당뇨라는 병마에 사로잡혀 투병생활과 선수생활을 겸임하고 있는 심성보. 이 외에도 많은 선수들의 이름이 떠오를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 프로야구에서 비운의 선수를 들라면, 사람들은 너무나 생생한 기억에 진저리를 치며 한 선수를 첫머리에 꼽습니다 – 80년대 히로시마 카프의 마무리 투수, 츠다 츠네미 (津田 恒美) 입니다. 일명 ‘불꽃의 스토퍼’ (Stopper: 마무리투수)라 불리며 ‘오직 직구!’를 외친 츠다 선수. 93년 7월 20일 뇌종양으로 인생을 마무리할 때까지 ‘한번만 더 공을 던지고 싶다!’라고 외치던 그런 선수가 바로 츠다였습니다. 사나이 츠다의 인생, 한번 되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화려한 젊은 시절츠다는 1960년 8월 1일, 야마구찌현(山口縣)신난요시(新南陽市)와다(和田)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시절부터 야구에 소질을 보였던 그는 난요(南陽)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야구부에서 활약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그가 전국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2학년이던 77년 7월 21일, 고시엔(甲子園) 대회 지역예선 1회전에서 완전시합 (Perfect Game)을 달성하면서부터 였습니다. 3학년이던 78년도에는 봄, 여름 고시엔 대회에 연속 출장하여 에이스로 활약하며 관서(關西)의 에가와 (江川卓 – 드래프트 파동의 주인공. 요미우리의 에이스)라고 불리며 프로구단의 지목대상이 되기 시작합니다.
어린시절 그는 조용한 성격의 아이었습니다. 공은 빠르지만 경기에만 출전하면 당황하여 제 성적을 내지 못하여 새가슴이라고 불리기도 하던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것은 3학년 고시엔 대회. 당시 우승후보로 불리던 난요공고는 에이스였던 츠다가 별 생각 없이 던진 단 한번의 실투의 결과로 2회전에서 탈락하게 됩니다. 눈물을 흘리며 후회한 츠다는 이때부터 ‘약한 마음은 최대의 적이다’라는 말을 그의 좌우명으로 삼고 진정한 승부사로 거듭나기 시작합니다. 1점 차이의 긴박한 승부에도, 10점 이상 차이 나는 압도적인 승부에도 변함없는 집중력을 보여주었던 그의 승부사 기질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졸업 후 교화(協和) 발효 사에 들어가 사회인 야구에서 활약하던 그는 프로 팀의 구애에 시달리다 결국 81년도 드래프트에 참가하게 되고 히로시마 카프에 의해 1차 지명으로 뽑히게 됩니다. 모든 구단이 노리던 강속구 파워피처를 손에 넣은 히로시마는 미친 듯이 기뻐했고 구단 사상 최초로 신인왕을 노려보겠다는 야심을 가지게 됩니다.
당시 키타벳부, 후쿠시 (福士敬章 = 장명부), 야마네 (山根和夫), 이케다니 (池谷公二郞), 오노 (大野豊) 등 5명의 10승대 선발진을 보유했던 히로시마였지만 촉망 받는 신인 츠다에게는 선발 한자리가 보장되었고 츠다는 구단의 기대에 완벽하게 보답합니다. 무너져버린 후쿠시와 이케다니의 공백을 메워주며 에이스 키타벳부에 이어 팀 내 다승 2위, 11승 6패 방어율 3.88을 기록하며 구단 첫 신인왕을 따내는데 성공합니다. 직구만을 고집하는 그의 승부자세와 불 같은 투지는 순식간에 관중들을 사로잡았고, 사람들은 그를 ‘츠네곤’ 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팬클럽을 결성하는 등 많은 사랑을 보냅니다. 히로시마 역사상 가장 화려한 첫해를 보낸 신인이었지요.
신인시절이 끝나고 2년차가 되었지만 그에게 그 흔하디 흔한 2년차 징크스는 없는 듯이 보였습니다. 전반기 내내 한단계 업그레이드된 실력을 선보인 그는 9승 3패 방어율 3.07이라는 화려한 성적을 보이며 배터리인 다쓰가와와 함께 첫 올스타 게임에 출전하여 우수선수상을 수상합니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거둔 화려한 성공을 하늘이 질투했던 것일까요. 올스타 경기에서 호투한 다음부터 츠다는 어깨에 뻐근한 통증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별일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도 잠시, 어깨 부상이라는 의사의 진단이 내리면서 그의 화려한 젊은 시절도 막이 내립니다.
악전고투강속구 투수들의 경우 어깨부상은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컨트롤보다는 스피드에 의존해 타자를 힘으로 누르는 파워피처들은 어깨부상 이후 공의 스피드가 떨어지면 타자들을 상대할 가장 강력한 무기를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스피드를 잃은 강속구 투수들이 그저 그런 투수가 되어 쓸쓸히 야구판을 떠나게 되는 광경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84년 츠다가 3승 4패 1세이브 방어율 4.64에 그치는 참담한 성적을 내자 많은 야구팬들과 평론가들은 츠다도 이제는 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더군다나 시즌 중, 그가 어깨부상이외에도 오른손중지에 혈액순환장애를 앓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투수생명은 이제 끝이라고 단정짓게 됩니다. 이상훈 선수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유명해진 혈액순환장애는 과도하게 팔을 사용하는 투수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병 중 하나로 무리한 운동을 하면 특정부위가 부어 오르기 때문에 한계투구가 20~30개 정도로 제한이 되게 됩니다.
지금이야 어느 정도 치료법도 개발이 되어있고 재기에 성공한 선수들도 있지만 당시에는 이병은 투수생명의 끝을 확정 짓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때까지 혈액순환장애에 걸리고도 성공적으로 투수생활을 연장한 선수는 단 한명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즌 종료 후, 츠다는 커다란 결심을 하게 됩니다. 혈액순환장애를 수술해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 방면의 수술은 걸음마 단계였고 일반인에 대한 성공결과는 있었으나 투수로서 수술을 받는 경우는 츠다가 세계 최초였습니다. 성공 가능성은 극도로 낮았으나 이렇게 투수생활을 연명하느니 차라리 도박을 걸어보겠다는 사나이 츠다는 과감히 승부수를 던집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으나 결과가 투구에 미치는 영향은 아무도 모르는 상태. 물음표를 단 채85년 시즌은 시작했습니다. 재기의 의욕에 불타 등 번호도 15번에서 14번으로 변경한 츠다는 이름도 츠네자네(恒實)로 바꾸며 한 시즌을 불태울 각오를 합니다. 하지만 결과는 실망적이었습니다. 2승 3패의 승률에 방어율은 6점 대를 훌쩍 뛰어넘는 최악의 성적이 나온 것입니다. 겨우 42이닝 만을 던지며 어깨가 꺾인 츠다. 통증은 여전했고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강속구는 힘을 잃은 지 오래 였습니다. 다른 수많은 유망주처럼, 그도 그렇게 사라지는 듯 했습니다.
화려한 부활85년 겨울캠프, 더 이상 부진하면 바로 방출될 지도 모른다는 벼랑 끝에 놓인 츠다는 그의 야구 인생을 걸고 훈련을 하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노력을 때늦은 짓이라며 무시했지만 그의 노력을 눈 여겨 보던 사람이 한명 있었습니다. 당시 히로시마를 이끌던 아난 감독이었습니다.
86년 개막전인 대 주니치전. 5 대 0으로 앞서가던 7회초, 호투하던 에이스 키타벳부 선수가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한 시즌의 3대 이벤트에 들어가는 개막전이니 만큼, 팀으로서는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경기였고, 그래서 츠다를 포함하여 경기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당시 마무리 투수였던 고바야시 (小林誠二) 선수가 등판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아난 감독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바로.. 츠다였습니다.
놀람 반 감격 반으로 마운드에 오른 츠다는 그의 야구인생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경기에서 팔이 빠져라 역투를 합니다. 그리고, 그의 등판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모든 사람들을 잠재우는 150km의 직구를 연신 찍어대며 전업 마무리 투수로서의 첫 세이브를 기록합니다. 앞으로 너무나 많이 보게 될 장면의 서곡처럼 말입니다.

그토록 원하던 기회를 잡은 츠다의 역투는 전반기 내내 계속되었고 츠다는 부상에서 돌아온 초보 마무리투수 답지 않게 리그 정상급 실력을 보여주며 모두를 놀라게 합니다. 그의 전반기 성적은 3승 4패 12세이브. 28시합에 등판하여 단 6번의 구원실패 (Blown Save) 만을 기록하였고 방어율은 무려 0.93이었습니다. 그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묵직한 직구만을 찍어대는 그의 모습은 히로시마 팬들에게는 흔들림 없는 청동거인과도 같았고 상대팀에게는 지옥의 수문장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당시 츠다의 직구 위력에 대한 두 가지 만화 같은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힘으로 승부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줬던 츠다의 위력에 많은 타자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가던 86년 9월 24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4번 타자인 하라(原辰德)가 츠다와 맞대결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선두를 놓고 반경기 차로 엎치락 뒤치락 하던 히로시마로서는 절대 놓칠 수 없는 경기였습니다.
(주1)9회 2사 1루. 1점차이니 만큼 장타 하나면 동점이 되는 상황에서 츠다는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고 2구째를 던졌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구질은 직구. 조금 늦게 알아차린 하라의 한 템포 늦은 풀 스윙. 공은 배트 안쪽에 맞았고 3루수 앞으로 힘없이 굴러갑니다. 잽싸게 공을 잡은 3루수가 1루로 공을 던졌지만 1루에는 당연히 뛰어와야 할 타자가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타자였던 하라는 타석에서 뒹굴고 있었지요. 믿거나 말거나, 츠다의 공에 배트가 밀려 타자의 손목이 부러져 버린 것이었습니다. 데드볼이면 모를까, 투수의 공을 때린 타자, 그것도 장타력 최강의 4번 타자가 공을 때려 손목이 부러졌다는 것은 정말로 만화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85년도 우승팀으로 ‘홈런 200발 타선’을 자랑하던 한신의 클린업 트리오와 상대했을 때도 진정 강함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습니다. 전설의 백스크린 3연발의
(주2) 주인공인 바스 (Randy Bass) – 가케후(掛布) – 오카다 (岡田)와의 대결에서 츠다는 단지 공 9개만으로 이닝을 끝내버립니다. 세명 모두 삼구 삼진으로 말입니다. 단지 직구만을 우겨넣어서 이루어낸 결과이기에 사람들은 더욱 경악을 금치 못했던 것이지요.
전반기의 그의 성적은 매스컴들이 온갖 수식어를 붙여대며 찬사를 해댈 정도였고, 결국 그는 그의 생애 두번째 올스타전에 출전하게 됩니다. 첫번째 올스타전에서 활약한 것처럼, 큰 무대에서 더욱 빛나는 그의 실력은 당시 세이부 라이온즈의 슈퍼루키 기요하라 (淸原)를 삼진으로 잡으며 절정에 이릅니다.
통증이 없어졌다는 마음에 너무 무리를 한 탓 일가요? 후반기에 그는 피로에 쌓여 전반기 만큼의 실력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부상경험이 있는 초보마무리에게는 소화해내기 힘든 이닝 수였기 때문입니다. 전반기 방어율은 0.93이었지만 후반기 방어율은 3.52였습니다. 수호신이 흔들리게 되자 팀도 부진을 거듭하게 되고 결국 8월 3일, 그때까지 아무도 넘보지 못하게 지켜오던 선두자리를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하지만 츠다는 역시 츠다였습니다. 계속되는 연투에도 단 한마디 불평도 하지않은 채, 그는 팀을 위해 던지고 또 던졌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한 그의 투구 덕인지 다시 정신을 차린 히로시마는 9월 23일 선두자리를 회복하고 시즌이 거의 끝나가던 10월 12일, 야쿠르트와의 경기에서 우승을 확정 짓습니다.
앞에서 나왔듯이, 당시 선발이었던 키타벳부는 츠다를 헹가래 투수로 만들어주기 위해 자진 강판을 합니다. 경기 후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올해의 끝은 지난 몇 년간 고생만 해온 츠다에게 맡기고 싶었습니다. 시즌 전반 팀을 혼자 이끌어가다시피 한 그의 힘이 없었다면, 올해의 우승은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신인왕을 따낸 데뷔시즌이후 4년 만에 부상 없이 한 시즌을 보낸 츠다에게는 ‘올해의 컴백상’
(주3)이 수여됩니다.
이 해 센트럴리그를 우승한 히로시마는 일본시리즈에서 아키야마(秋山)-기요하라의 ‘AK포’를 앞세운 세이부 라이온즈와 맞붙게 됩니다. 첫 경기 2-2무승부 이후 계속된 2-1, 7-4, 3-1의 3연승. 이긴 경기마다 모조리 등판하여 승리를 지켜낸 츠다에겐 너무나도 장미빛인 미래가 보이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호사다마였을까요. 제 5차전에서 키타벳부를 구원한 츠다는 연장 12회말, 상대투수 구도(工藤)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고 1-2 패배를 맞보게 됩니다. 6, 7차전을 연거푸 1-3으로 진 히로시마는 일본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벌어진 일본시리즈 8차전에서 2-3으로 역전패를 하면서 우승의 꿈을 접고 맙니다. 통한의 안타하나로 무너지긴 했지만 츠다의 공로는 모두가 인정하여 일본시리즈 우수선수로 뽑히게 됩니다.
불꽃의 스토퍼87년 시즌도 주전마무리로 꾸준한 성적을 보여준 츠다였지만, 88년 시즌에는 여러모로 아쉬운 모습을 보이며 무려 9패를 기록합니다. 당시 매스컴에서는 그를 ‘사요나라의 츠다’라고 부르며 놀려대곤 했습니다. 89년 언제나 그를 믿어주었던 아난 감독이 물러나고 한때의 동료였던 히로시마의 영원한 4번타자 야마모토 코지(山本浩二)가 감독으로 취임하자 츠다의 자리도 위협을 받기 시작합니다.
츠다의 불안한 마무리를 걱정한 야마모토 감독은 시즌 초에 더블스토퍼 체제를 고려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무너진다면 츠다가 아니지요. 이러한 조치를 오히려 분발하는 계기로 삼은 츠다는 그 어느 때보다 위력적인 공을 뿌려대며 부활합니다. 기합에 가득찬 정면승부. 불을 뿜는 강속구. 팬들은 어느새 그를 ‘불꽃의 스토퍼’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해 츠다는 고대하던 구원왕 자리에 오릅니다. 12승 5패 28세이브. 무려 40세이브포인트에 일본 기록인 12연속 세이브, 20이닝 연속 무실점까지 기록한 결과였지요.
그러나... 츠다의 영광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주1)
이 해 히로시마는 거인과 우승을 놓고 마지막 사투를 벌이다 10월 12일에야 우승을 확정 짓습니다. 다시 선두자리를 뺏어서 우승을 위한 매직넘버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날은 바로 전날인 23일. 24일 경기는 히로시마로서는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경기였습니다.
(주2)
백스크린 3연발은 한신 타이거즈 팬이라면 절대로 잊을 수 없다는 대사건입니다.
1985년 4월 17일. 대 거인전 3연전중 2회전. 3대1로 패색이 짙던 7회말 공격에서 거인의 에이스 마키하라의 공을 3번타자 랜디 바스가 통타, 백스크린(전광판)을 직격하는 시즌 1호 3점 역전홈런을 때려냅니다. 이어 타석에 들어선 가케후도 가볍게 풀스윙, 역시 백스크린을 직격하는 시즌 2호 솔로홈런. 마지막으로 오카다 까지 백스크린을 직격하는 시즌 1호 솔로홈런을 때려버립니다. 한신 팬들은 너무나 흥분해서 거의 폭동수준이었답니다.
(주3)
부상 등으로 제대로 성적을 올리지 못하다 다시 부활한 선수에게 주는 상. 삼성에서 뛰다 다이에로 돌아가 뛰어난 성적을 기록한 김일융 선수도 이 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