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1945년 8월 6일. 날씨 맑음.
히로시마 시내에는 공습경보가 울리고 있었습니다. 시민들은 벌써 며칠째 계속되는 공습에 질린 터라 서둘러 대피소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공습은 조금 달랐습니다.

이놀라 게이 (Enola Gay) 에서 떨어진 우라늄 235 폭탄 한발은, 히로시마를 잿더미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대피소도 소용이 없었고, 히로시마 시내는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34만 3000명의 인구중 약 7만 명이 사망, 13만 명이 부상당했으며 완전 연소 되거나 파괴된 가옥 6만 2000호, 반파된 가옥 1만 호, 10만 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역사상 유래가 없는 재난이었고, 삼일 후 역시 원폭의 피해자가 되는 나가사키와 비교해도 세배 이상의 피해였습니다.
원폭의 위력에 놀란 일본 정부가 열흘 후 무조건 항복을 외치면서 태평양 전쟁은 끝이 납니다. 하지만 히로시마 시민들에게는 이미 어떠한 희망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탄생 – 카프의 아버지1949년, 일본 프로야구는 그때까지 유지해 왔던 단일 리그 제도를 폐지하고 양대 리그 제도를 도입하게 됩니다. 현대 일본야구의 기틀이 마련해 지는 중대한 시기였지만, 폐허가 된 도시에서 당장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히로시마 시민들에게는 프로야구는 먼 꿈나라와도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히로시마에는 이러한 꿈을 이루어 내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리그가 분열되게 되면, 자연히 더 많은 팀이 필요하게 된다. 우리 히로시마에도 프로야구 팀을 만들어 보자!’ 라는 생각을 해낸 사람은 사업가였던 야마구치(山口) 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업상의 이유로 프로야구 연맹과 거북한 사이였기 때문에 대타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야마구치는 당시 전쟁 중에 내무성 경보 국장이었다는 이유로 추방당해 낙향해 있던 전 국회의원 타니가와 노보루(谷川 昇)에게 그의 생각을 말하고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타니가와는 일단 거절하였으나, 아들의 책상에서 프로야구 선수들의 브로마이드를 발견하고는 ‘패전 후 일본에 살고 있는 학생들의 꿈이 무엇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원폭으로 상처를 받고 재건되지 않는 그의 고향에 프로야구 팀이 생긴다면 적어도 히로시마 시민들이 꿈을 가지고 동경할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타니가와는 마음을 정하고 히로시마에 야구단을 창설하는데 그의 모든 것을 투자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세번째 조력자는 의외의 곳에서 나타났습니다. 당시 쥬고쿠 (中國) 신문사 도쿄지사의 통신 부장이었던 가와구치(河口)는 도쿄를 방문한 타니가와를 만난 자리에서 그의 사고 자체를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말을 듣게 됩니다. ‘기업의 선전대로서의 프로 구단이 아니라, 연고지와 사람들의 이익으로 지탱해 가는 구단을 만들고 싶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이념에 감동한 가와구치는 직접 펜을 들어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잉어처럼 힘차게 뛰어라는 의미로 ‘카프(Carp)’라는 이름을 작명하고 다음날 쥬고쿠 신문에 시민들의 협조를 요청하는 기사를 씁니다.
사실 이러한 이념의 배경에는 어쩔 수 없는 현실도 작용하였습니다. 원폭으로 인해 산업 기반 자체가 무너져버린 히로시마에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프로야구 구단을 유지할만한 대기업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히로시마에 프로야구 단이 창설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힘을 모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12월 3일에 준비위원회가 설립되었고 5일에는 히로시마 상공회의소에서 ‘히로시마야구클럽’ 설립 준비위원회 발회식이 거행되었습니다. 회장에 취임한 타니가와는 취임연설에서 ‘카프는 한사람의 것이 아니라 시민 모두의 것입니다’라고 말했고 직접 문패에 ‘카프’라는 문자를 써넣으며 결의를 다지게 됩니다. 시민들의 반응은 뜨거웠고 준비위원회 사람들의 가슴은 불타오르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타니가와와 가와구치는 생업은 포기하다시피 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 당국과 지방 자치단체를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반응은 호의적이었으나, 전후의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이름뿐인 팀에 투자해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목표로 했던 최소 모금금액은 2500만엔 이었으나 어렵게 모은 돈은 그 절반도 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선수들을 모으기는커녕 일본 야구연맹에 가입비조차 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연맹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가입금 납입을 연장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며 은행에는 무담보로 돈을 빌려달라고 생떼를 썼습니다. 관심을 보이는 기업이 있다는 소리가 들리면 득달같이 뛰어갔고 구두 한 켤레가 보름도 되지 않아 헤질 정도로 열성과 열의를 달하였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시민들은 ‘카프’라는 이름에 열광하였고 담보도 잡지 않고 기부를 해주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었는지, 결국 히로시마는 연맹에 가입비도 내지 않았고, 주식회사로 등록하지도 않은 상태였지만 1950년 시즌 참가를 일본야구 연맹으로부터 허락 받게 됩니다.

1950년 1월 15일. 현재 히로시마 현청 자리에 있던 서 연병장에서 꿈은 이루어졌습니다. 히로시마 야구클럽은 정식으로 결성되어 선수들과 감독, 시민들이 맞대면하였고 시민들은 ‘우리들의 카프’라고 외치며 탄생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감독으로는 히로시마 출신이며 전 쇼치쿠 로빈스 감독인 이시모토 슈이치씨가 선출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곳에도 타니가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타니가와의 활동이 선거 활동의 일부라고 의심한 법무부 심사국에서 타니가와에게 그에게 내려진 추방령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며 손을 떼라고 협박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카프의 아버지였던 타니가와는 어쩔 수 없이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카프에서 손을 떼게 됩니다.
타니가와는 다음해 추방이 해제되었고 정계로 복귀했으나 1955년 2월, 세번째 당선 직후 병으로 급사했습니다.
카.프.매.니.아. 뽀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