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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야구 역사상 최고의 게임을 선택하라면, 어떤 기준으로 선택을 해야 할까요?
각 사람들마다 자신의 기준에 따라 다른 선택을 할 것이고 많은 주장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사상 최고의 게임 이라면 다음과 같은 조건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 우리 팀이 있어야 한다 2. 우리 팀이 이겨야만 한다 3. 상대팀이 죽도록 미워야 한다 4. 극적인 뒤집기 한판 승 이여야 한다 위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게임은 많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프로야구 개막전, 극적인 끝내기 홈런으로 막을 내린 원년 한국시리즈 6차전, 유두열의 한방과 최동원의 불을 뿜는 투구로 대반전을 이루어낸 84년 한국시리즈 7차전 등 프로야구 초창기의 명승부들만 해도 최고의 게임으로 뽑기에 아쉬움이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게는, 사상 최고의 게임은 프로야구 경기가 아니었습니다. 제 기준에서 사상 최고의 게임은... 82년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제27회 세계 야구선수권대회 한일전이었습니다. ![]() 대표팀 1976년 세계 아마 야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며 세계무대에 등장했던 한국은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하며 5위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고 물러납니다. 하지만 다음해인 77년 니카라과에서 열린 대륙간컵 대회에서는 김응룡 감독의 지휘아래 김재박과 이선희의 활약을 바탕으로 우승의 감격을 누리게 됩니다. 용기 백배한 한국팀은 실력을 갈고 닦아 78년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3위를 차지했고, 80년 세계선수권 대회에서는 세계 최강인 쿠바에게만 뒤지며 홈팀 일본과 공동으로 준우승을 차지하게 됩니다. 점점 늘어가는 실력으로 칼을 갈던 한국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회가 온 것은 82년 이었습니다. 82년 세계선수권 대회를 유치하여 홈 그라운드의 이점을 마련한 한국이 넘기 힘든 벽은 쿠바였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문제로 쿠바가 세계선수권 대회 불참을 선언하고 나오자 한국에게도 서광이 비치게 된 것입니다. 정부에서는 “세계선수권 대회 우승시 병역 면제”라는 당근을 내밀며 선수들을 격려했고, 잠실 야구장이라는 당시로는 대단한 시설을 자랑하는 경기장을 지어 무대를 마련해 줍니다. 당시 사람들이 세계선수권에 걸었던 기대는 체신부가 기념우표를 발행했던 것 만으로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호사다마일까요, 호재가 연속되던 한국대표팀에게 가장 큰 문제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바로 프로야구의 출범이었습니다. 실업 팀에서 활약하던 선수들에게, 연고지 구단의 유니폼과 거액의 연봉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습니다. 아마야구에서는 애국심에 호소하며 선수들을 붙잡았으나, 많은 스타 플레이어들은 유혹에 넘어가 프로로 진출합니다. 급해진 아마 야구에서는 프로행 규제선수 리스트를 발표하여 대표팀의 프로행을 막았으나, 81년 말에 이미 프로와 계약한 선수들은 어쩔 수 없었기에 전력 누수는 심각했습니다. 프로로 진출한 선수들 중에서 대표팀에 가장 타격을 준 선수는 국제용 에이스였던 이선희였습니다. 니카라과 대륙간 컵 우승의 주역이자 당시 세계 최고 레벨의 좌완 투수였던 그는 대표팀의 에이스로 내정이 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거액의 배팅을 한 삼성에 입단을 하게 되자 대표팀은 좌완 투수가 단 한명도 없다는 딜레마에 빠졌고, 결국 당시 선린 상고를 갓 졸업하여 대학교 1학년이었던 박노준이 급하게 투입됩니다. 대신 에이스 몫을 해주리라 믿었던 최동원은 부상으로 제 활약을 하지 못했고 김시진 마저 저조한 성적을 보이자 대표팀은 막내였던 스무살의 선동열에게 에이스 자리를 맡겨야 할 만큼 다급했습니다. 77년 대표팀의 4번 타자 홈런왕이자 붙박이 1루수 였던 김봉연의 공백은 원래 포수였던 인하대 김진우가 메워야 했습니다. 김봉연의 뒤를 이은 4번 타자이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4번 하라(原)와 자주 비교되던 거포 3루수 김용희마저 롯데로 가자 4번 자리는 영원한 3번 타자 장효조가 맡아야 했고, 대표팀은 대회 내내 장타력 부재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김용희의 자리는 한대화가 대신 하였으니, 전화위복이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덕분에 대표팀 최고의 파워히터는 팀 최다 홈런인 3홈런을 때린 이해창이 됩니다. 여기다가 마지막 순간까지 아마와 프로 사이에서 고민하다 오더가 나오기 직전에 프로로 도망가버린 대표팀의 1번 타자 김일권의 공백을 더하면 대표팀은 최고의 모습이라고 부르기엔 무리가 있었으며, 사람들의 입에서는 '사상최약체의 대표팀이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김일권의 자리는 조성옥과 김재박이 대신해야 했지만, 선두에서 물꼬를 터줄 1번 타자의 부재는 여러모로 대표팀을 괴롭혔습니다. (주1) 충격의 역전패... 그리고 부활 1982년 9월 4일, 홈 그라운드의 이점을 안고 기세등등 하게 출격한 대표팀의 첫 상대는 약체 이탈리아 였습니다. 객관적인 전력상 하위권으로 분류된 이탈리아를 맞은 대표팀은 에이스 김시진을 내세워 필승을 다짐했지만, 약간은 느슨해진 상태였습니다. 4회 심재원의 우전안타로 1점을 먼저 얻은 대표팀이 더 이상 추가 득점을 내지 못하는 동안 이탈리아의 매서운 반격이 이어졌습니다. 5회까지 2안타로 완벽에 가깝게 막아주던 김시진은 6회부터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7회 이탈리아의 카롤리에게 역전 2타점 2루타를 허용해 2-1로 역전을 당하게 됩니다. 필사적인 반격도 실패로 돌아가 경기는 2-1로 끝나게 되고 대표팀은 충격의 1패를 당하게 됩니다. (주2) 이 패배는 약간은 안이한 생각을 하고 있던 대표팀을 흔들어 깨우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다음 경기인 미국 전에 등판한 선동열은 1회에 1실점을 한 것을 제외하면 환상적인 투구를 선보이며 공포의 미국 타선을 15 탈삼진으로 침묵시키며 2-1 역전승의 일등 공신이 됩니다. 당시 한국 최고의 투수였던 최동원을 스카우트 하러 한국에 들어왔던 메이져리그 스카우트들은 선동열의 투구를 보고 경악했고, 선동열이 해태에 입단하는 순간까지 선동열을 집요하게 따라다닙니다. 병역 문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박찬호보다 십 여년 이상 전에 한국인 메이저리거를 볼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선동열의 투구로 용기 백배한 대표팀은 파죽지세로 상대팀들을 연파하기 시작합니다. 선동열은 당시 전승을 기록하고 있던 대만과의 경기에 한번 더 등판하여 탈삼진 8개를 곁들인 완봉승을 거두며 대표팀의 구세주로 칭송 받게 됩니다. 9월 13일, 6승 1패를 기록하던 대표팀의 다음 상대는 호주였습니다. 다음날인 14일 일본과의 대전을 준비하던 대표팀의 마음은 당면한 호주 전에서 이미 멀어진 상태였습니다. 선발 투수는 김시진. 초반 홈런 두개로 3-0으로 앞서나갈 때만 해도 쉽게 1승을 추가하고 일본과의 경기 전에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 같던 대표팀은 의외로 강하게 치고 나오는 호주의 타선에 당황하게 됩니다. 5회 갑작스러운 난조를 보인 김시진은 집중 안타를 맞으며 강판 되었고 구원 투수진들도 불을 끄기는커녕 기름을 끼얹어 8회까지 무려 6점이라는 점수를 헌납하게 됩니다.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린 대표팀은 8,9회에 무섭게 반격을 했고, 유두열의 희생플라이로 6대6 동점을 만들어 연장전에 들어갔으나 잠실 구장의 야간 조명 시설 부족으로 인해 승부는 다음날 오전으로 미루어 집니다. 연장전과 결승전에 대한 부담으로 잠을 설쳤을 대표팀은 14일 오전에 벌어진 연장전에서도 빈타에 시달렸지만 방어율 0를 자랑하던 철벽 마무리 임호균을 투입하여 호주 타선을 틀어막고 연장 15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유두열의 희생타로 힘겨운 승리를 거둡니다. 이틀에 걸친 혈전을 벌이느라 피로에 허덕이던 대표팀에게 주어진 것은 몇 시간의 휴식뿐이었습니다. 토너먼트가 아니라 풀리그 방식이었지만, 똑같이 7승 1패를 기록하고 있던 한국과 일본의 경기는 사실상의 결승전이었습니다. 대회 최고의 카드였던 한일전은 14일 오후,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한일전 – 그 숙명의 무대 한일전은 언제나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모으는 카드입니다만, 이번 경기는 좀 특별했습니다. 일본 역사 교과서에 한국과 중국 등에 대한 침략사가 왜곡됐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시작된 교과서 왜곡 파동은, 2차 대전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는 내용의 역사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겠다는 일본의 뻔뻔한 행위에 치를 떤 온 국민들의 반일 감정을 불태우게 만들었습니다. (주3) 전 국민이 한일전 만큼은 필승을 다짐했고, 대표팀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안겨졌습니다. 굳이 이러한 사건을 제외하고라도, 안마당에서 벌어진 경기의 상대가 일본이라면, 결단코 질 수 없다는 것이 대표팀의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고향 팀의 유니폼과 거액의 연봉을 거부하기까지 하며 이 대회를 준비했던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들은 한일전을 앞두고 피곤한 몸을 다독거리며 전략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한일전의 선발투수는 미국과 대만을 잡으며 대표팀의 에이스 자리를 굳힌 선동열 이외의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호주전에서 등판해 많은 이닝을 던진 김시진과 임호균은 제쳐 놓고라도, 시리즈 내내 부진했던 최동원은 이미 에이스의 자리에서 물러난 상태였고, 오영일, 박동수, 박노준 등은 선발 감으로는 무리였습니다. 타선을 놓고 고민하던 대표팀의 어우홍 감독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오더를 작성합니다. 1, 2번은 조성옥 (중), 김재박(유)이 맡았고 중심타선에는 이해창(좌), 장효조(지), 그리고 한대화(3)가 들어갔습니다. 하위타선은 유두열(우), 김진우(1), 심재원(포), 정구선(2)으로 구성하였습니다. 전날까지 9번을 치던 한대화를 지켜보던 배성서 코치는 한대화의 뛰어난 타격 감을 주목하여 감독에게 보고 했고 어우홍 감독은 대학생이던 그를 심재원 대신 5번에 투입합니다. 경기가 시작되자 일본의 선발투수 스즈키는 눈물이 완벽한 변화구 코너워크를 자랑하며 한국 타자들을 요리해 버립니다. 연이은 삼진과 내야땅볼. 간간히 나온 내야 플라이들. 7회까지 노히트노런을 당하던 대표팀은 7회 말에야 한대화의 안타로 망신을 모면할 정도로 고전하고 있었습니다. 대표팀의 유일한 희망은, 에이스 선동열이 버텨 주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초반 제구 난조를 보인 선동열은 2회에 3안타를 맞고 유두열의 실책까지 겹치는 위기 속에 2점을 내주는 불안한 출발을 보였으나, 일단 위기를 극복하자 제 실력을 발휘하며 경기가 끝날 때까지 일본 타선을 단 1안타만 내주며 막아냅니다. 2-0, 살 떨리는 투수전이 지속되고 관중들의 손바닥엔 땀이 맺혀가기 시작할 때 즈음, 경기는 운명의 8회 말에 접어들게 됩니다. 운명의 8회말 8회 말. 2점차로 지고있는 한국으로서는 한 점이라도 따라가야 하는 절체 절명인 상황이었으나 타선은 하위타선인 8번부터 시작했습니다. 더군다나 7회 한대화가 처음으로 안타를 치고 나가 맞은 기회를 무산 시켜 분위기는 다운된 상태. 팀 내 최고참 이던 심재원은 철옹성 같던 스즈키에게 악을 쓰고 덤벼들어 중전안타를 뽑아냅니다. 무사 1루. 타자는 이번 대회 내내 2안타에 그치며 극도로 부진한 타격을 보이던 2루수 정구선. 어우홍 감독은 망설임 없이 대타를 불렀고, 선동열의 고대 선배였던 김정수가 헬멧을 쓰고 타석에 들어섰습니다. 후배의 호투를 무산시킬 수 없다는 듯, 김정수는 중견수 키를 넘기는 적시 2루타를 때려내서 심재원을 불러들입니다. 2-1, 타선은 상위타선으로 연결. 일본 선발 스즈키는 마침내 강판 당합니다. 구원투수인 니시무라가 등판하고, 1번 타자 조성옥은 희생번트를 대서 김정수를 3루 까지 보냅니다. 2-1, 1사 3루, 타석에는 그라운드의 여시, 실업 7관왕, 77 대륙간 컵의 영웅 등 화려한 수식어로 도배된 아마야구 최고타자 김재박. 3루 코치 박스에서 사인을 보내던 어우홍 감독의 손이 바쁘게 움직입니다. 감독을 주시하는 김재박의 눈에 어우홍 감독의 왼손이 모자를 거쳐 가슴으로 내려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김재박의 눈이 번뜩입니다. “스퀴즈다!” 그러나... 아이러니일지는 모르지만 이 역사에 남을 플레이는 사인 미스였습니다. 일본전에서 대표팀의 스퀴즈 사인의 시작은 왼손이 아니라 오른손이었습니다. 어우홍 감독은 상대 배터리를 속이기 위하여 거짓 스퀴즈 사인을 낸 것입니다. (주4) 감독의 예상대로 일본 배터리는 속아주었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타자까지 속아버린 것이었습니다. 볼카운트 1-1에서 반쯤 일어나다시피 하며 바깥쪽 높은 공을 요구한 포수. 회심의 표정으로 공을 뺀 투수. 눈이 수박만 해진 우리의 여시 김재박. 김재박은 여기서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한국야구 사상 최고의 번트를 보여줍니다. 그의 눈이 번쩍인 그 순간, 어느새 그는 개구리점프로 땅을 박차고 타석에서 뛰어올랐습니다. 포수가 일어나서 받을 정도로 바깥쪽으로 완전히 빠지는 공을 향해 배트를 내민 김재박. 말도 안 되는 우연인지, 정말 대단한 실력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공은 배트에 맞고 절묘하게 3루 라인을 따라 페어 지역으로 굴러갔습니다. 미친 듯이 1루로 뛰어가는 김재박. 당황한 포수가 잔디에서 볼을 더듬는 사이 뒤늦게 출발한 김정수는 홈인 하여 2-2로 동점. 정말로 여시같은 김재박은 1루 에서 세이프. 관중들은 탄성을 지르며 흥분하기 시작합니다. 2-2 동점, 1사 1루. 더군다나 1루 주자는 발 빠르고 주루 플레이 잘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김재박. 타석에는 3번 타자인 이해창이 들어섰고, 큰 경기에 강하기로 유명한 그답게 멋진 중전안타로 1,3루를 만들며 투수를 강판시킵니다. 2-2, 1사 1,3루. 주자는 최고 준족들인 김재박과 이해창. 짧은 외야플라이 하나만으로도 역전이 가능한 순간. 관중들이 하나, 둘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타석에는 영원한 3할 타자 장효조가 들어섰습니다. 바뀐 일본 투수는 세키네. 좌타자인 장효조는 정석답게 우측으로 당겨 쳤지만 세키네의 변화구 타이밍을 맞추지 못해 타구는 1-2루간 내야 땅볼이 됩니다. 황금의 찬스가 병살로 날아가려는 듯한 순간, 일본 2루수는 발 빠른 이해창을 의식해서 였는지, 노아웃으로 착각해서 였는지, 4-6-3 병살을 포기하고 공을 잡자마자 홈으로 송구합니다. 워낙 송구가 정확해서 필사적으로 달려오던 여시 김재박도 도리 없이 홈에서 태그 아웃 되었으나 이 판단 미스 하나가 경기의 승패를 결정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2사 1,2루. 타자는 5번, 한대화. 7회까지 유일하게 안타를 때렸던 그였기에, 관중들은 흥분하며 기대하기 시작합니다. 스트라이크, 볼, 볼, 스트라이크. 2-2 상황에서 몸쪽을 찌르는 회심의 직구. 그러나 간발의 차이로 주심의 손이 올라가지 않아 2-3 풀카운트. 8회말, 2-2 동점, 2사 1,2루, 2-3 풀카운트. 정말로 영화에나 나올만한 장면. 고뇌하던 세키네가 선택한 공은 슬라이더. 그러나 긴장 탓이었는지 너무 변화 없이 회전만 걸린 밋밋한 공. 한대화가 제일로 좋아하는 구질. 주저 없이 돌아간 배트. 잔뜩 당겨친 공은 왼쪽 담장을 향해 아름답게 뻗어나갔습니다. 파울이냐, 홈런이냐.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흐른 후 공은 왼쪽 폴대를 때려버렸습니다. 전원 기립하여 열광하는 관중들. 메아리 치는 함성소리. 숫제 울부짖는 MBC 김용 아나운서와 허구연 해설자. 승부에 쐐기를 박은 쓰리런 홈런. 이제 점수는 5-2. 9회초에 등판한 에이스 선동렬은 열광하는 관중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9회초를 범타로 끝내 2실점 완투승으로 경기를 마무리합니다. 일본을, 숙적 일본을 꺾은 것입니다. 그렇게 한국은 우승을 차지했고, 3승의 선동열은 MVP와 다승왕, 방어율 0의 임호균은 방어율 왕에 등극합니다. 포지션 별로 뽑는 대회 올스타에는 선동열과 김재박이 우완투수와 유격수에 뽑히게 됩니다. (주5) ![]() 결말 세계 야구선수권대회 우승으로 한국은 국제대회 규모로는 두번째 우승의 기쁨을 누렸고, 1938년 세계선수권대회가 생긴 이래 아시아권 국가로는 처음으로 우승을 하게 됩니다. 일본마저도 쿠바의 벽을 넘지 못해 항상 준우승에 머무르던 대회를, 비록 쿠바가 불참 했다 하더라도 우승했다는 것은 대표팀과 국민들의 마음에 큰 자신감을 심어주었습니다. 제가 이 경기를 감히 사상 최고의 게임으로 부르는 이유는 이경기가 한국 야구를 부흥시킨 주원인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반일감정이 팽배해 있던 국민들에게 이 게임은 성전(聖戰) 이었고 대표팀은 영웅이었습니다. 이 경기를 경기장에서, 집에서, 술집에서 지켜본 많은 사람들이 야구라는 운동을 흥미를 가지게 됩니다. 대표팀 멤버들이 프로야구에 뛰어들자, 사람들의 관심은 자연히 프로야구로 쏠리게 됩니다. 당시만 해도 국내 최고의 스포츠는 프로복싱과 고교야구 였으나 이 경기를 기점으로 해 갓 태어난 프로야구가 인기를 구사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래리 버드-매직 존슨이 맞붙은 79년 대학농구 결승전을 지켜본 팬들이 이 두 선수를 따라 NBA 팬이 된 것처럼 말입니다. 대표팀 선수들은 초창기 한국 프로야구의 기틀을 잡은 것입니다. 뽀레 대표팀 멤버 이름 포지션 나이 소속 김시진 투수 23 경리단 ![]() 최동원 투수 25 한전 임호균 투수 26 한전 선동열 투수 20 고려대 오영일 투수 22 인하대 박동수 투수 22 동아대 박노준 투수 21 고려대 심재원 포수 29 한국화장품 김진우 포수 25 인하대 한문연 포수 22 동아대 이석규 내야수 24 경리단 정구선 내야수 25 경리단 한대화 내야수 21 동국대 김재박 내야수 28 한국화장품 박영태 내야수 24 동아대 이선웅 내야수 22 인하대 조성옥 외야수 23 상업은행 장효조 외야수 25 경리단 유두열 외야수 27 한전 김정수 외야수 23 고려대 이해창 지명타자 29 한국화장품 (주1) 대한야구협회는 오더 작성 직전에 프로 입단으로 방향을 틀어버린 김일권에게 분노를 퍼 부었지만, 이미 프로계약을 해버린 선수에게 징계를 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궁여지책으로 내 놓은 방안이 ‘평생 국가대표 선발 금지’였지만, 이미 프로로 넘어가서 국가대표는 물 건너간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런 징계가 될 수가 없었습니다. (주2) 이탈리아는 6일 벌어진 일본과의 경기에서도 충격의 3-2승을 거두며 대회 최대의 다크호스로 떠올랐지만 그 후 벌어진 7게임에서 전패하며 10개국 중 꼴지를 기록합니다. (주3) 일본 문부성이 지난 82년 7월 검정을 마치고 공개한 1983학년도용 역사 교과서에 한국과 중국 등에 대한 침략사가 왜곡됐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시작된 교과서 왜곡 파동은 특히 2차 대전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는 역사 왜곡이 일본 정부의 주도로 이뤄졌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각료들의 망언이 이어지면서 교과서 왜곡은 일본과 한국, 중국 등의 외교적 마찰로 비화되었습니다. 일본 고교 교과서 중 16종에서 24개 항목, 167군데가 왜곡 또는 부적당하게 표현된 것으로 드러났고, 이들 교과서는 8.15 해방을 "일본이...지배권을 상실했다"로 기술하고 `침략'이라는 단어를 모두 삭제했으며 침략 관련 단어도 `탄압'을 `진압', `출병'을 `파견',`억압'을 `배제', `수탈'을 `양도' 등으로 바꾸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한국과 중국의 거센 반발의 부딪친 일본 정부는 몇 차례의 발표 끝에 11월 24일 근-현대의 역사적 사실 기술에 대해서는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의 의견을 적극 배려하겠다는 새 `교과서 검정기준'을 발표하며 파동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주4) 이 개구리 번트는 한국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인 미스라고 불리며 단골로 인용되는 사건이지만, 현대의 김재박 감독은 아직까지도 당시 그의 번트가 사인 미스가 아니었다고 주장합니다. 당시 분위기상 기습번트를 노린 것이었고, 그 도박성 짙은 선택이 성공한 것이었으므로 사인 미스는 억울한 누명이라고 말입니다. 81년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벌어진 제5회 대륙간컵 대회 일본전 8회에도 기습번트안타로 돌파구를 열어 팀을 2-0 승리로 이끌었던 전적을 생각해 보면 나름 타당하기도 한 주장입니다. 반면 어우홍 감독은, 호주전 까지 스퀴즈 번트의 사인은 왼손으로 시작했지만, 사인이 노출되는 듯해 결승전 경기만 오른손으로 바꾸었다고 말하며 김재박의 실수일 것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주5) 9회 선동열이 일본타선을 막아내어 승리가 결정되는 순간, 모든 관중들은 기립하여 한대화를 연호해 댔고, 덕분에 게임 MVP를 발표하던 발표자가 분위기에 휩쓸려 내정되었던 선동열 대신 한대화의 이름을 불러버렸습니다. 덕분에 그 다음날 수상자가 바뀌는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승부사 츠다
릴리프, 스토퍼 등의 용어로 표현되는 구원 투수들은 절대절명의 위기를 진압하는 특성 때문에 흔히 ‘소방수’에 비유됩니다. 그리고 만약 자주 구원에 실패할 경우 ‘방화범’이라는 오명이 붙게 되곤 합니다. 하지만 츠다가 ‘불꽃의 스토퍼’라고 불리게 된 이유는 불을 지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고있는 불에 더 강한 불꽃을 끼얹어 제압했기 때문입니다. 마무리 투수들의 승부구는 대부분 변화구입니다. 현대에 들어 타자들의 타격기술이 점점 향상되자 타자들의 타이밍을 뺏는 변화구는 투수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었지요 사사키에게는 포크볼이 있었고 선동열에게는 슬라이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츠다에게는 직구 하나 뿐이었습니다. 사내답게 싸우기 위해 유인구 하나 없이 언제나 150km의 직구 승부만을 고집했던 츠다는 진정한 승부사였습니다. 그의 직구는 말 그대로 불을 뿜었고 타자들과 심판들은 쉴새 없이 꽂아대는 그의 직구에 질려버렸습니다. 인코스를 노리고 있는 타자들에게는 머리에 바짝 붙인 빈볼로 응징했고 전타석에 홈런을 때린 선수에겐 똑 같은 코스의 직구로 삼진을 잡아내 보복했습니다. 츠다의 모토는 ‘칠테면 쳐봐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츠다의 전성기 시절, 상대 팀들에서는 ‘컨디션 좋은 날 츠다의 공은 하느님도 칠 수 없다’ 라는 말이 돌기도 했습니다.신인시절, 츠다는 포수였던 다쓰가와가 주문했던 변화구를 던지다 끝내기 홈런을 맞은 적이 있었습니다. 시합 후 흐느끼는 츠다에게 다가간 다쓰가와는 말했습니다. ‘이제 잔재주는 그만두자. 앞으로는 직구 하나만 가지고 결사적으로 한번 해보자’ 이 말은 그 후 츠다의 야구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츠다의 통산 성적은 49승 90세이브, 방어율 3.31입니다. 선동열 선수가 일본에서 단 3년 만에 90세이브가 넘는 기록을 세운 것과 비교하면 그다지 눈에 띄는 기록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마무리로 뛴 햇수가 86년부터 89년까지 단 4년뿐이라는 것과, 요즘처럼 투수 분업화가 되어 있지 않은 시대의 기록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이 기록은 대단히 뛰어난 성적입니다. 그의 기록은 일본 프로야구 통산 16위에 올라가 있고, 리스트에 있는 다른 투수들은 대부분 전업 마무리로 10년 가까이 뛴 선수들입니다. 고난의 시작 1990년 시즌이 시작되기 전, 히로시마의 팬들이 츠다에게 거는 기대는 절대적이었습니다.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것 같은 그의 모습에서 팬들은 힘을 얻었고, 그의 불꽃 같은 직구를 보며 어린이들은 프로야구 선수가 된 자신의 미래를 상상했습니다. 당시 츠다를 우상으로 삼던 아이들 중 하나가 세이부의 괴물 투수, 마쓰자카 (松坂)였습니다. 그 해 드래프트 1번으로 들어온 거물 신인이자 미래의 에이스, 사사오카 (佐佐岡)도 츠다의 팬이었습니다. 그러나 시즌이 시작하고 단 네경기 만에, 츠다는 오른쪽 어깨에 이상을 느끼고 강판 당합니다. 그리고 부상이 상상외로 심각하다는 것을 발견하곤 본격적인 재활 과정에 들어가지만, 재활 중인 8월에 다시 한번 인대를 손상해 결국 90년 시즌 내 복귀는 실패했습니다. 츠다의 자리인 마무리에는 츠다를 동경하던 신인 사사오카가 투입되어 전천후로 17세이브를 기록합니다. 츠다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된 팬들은 실망했으나, 그의 복귀를 의심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츠다라면, 사나이 츠다라면, 이런 부상쯤은 툭툭 털고 일어날 것이 너무나 당연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늘 그래왔으니 말입니다. ‘괴로울 때도 도망가지 않는다, 언제나 베스트로 맞선다.’라는 그의 좌우명은,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오프 시즌동안, 츠다는 죽자 사자 재활에 매달렸고 2월쯤에는 이미 부상 전의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운명의 91년 시즌 직전, 팬들과 동료들, 그리고 츠다 자신도 재기를 의심할 나위 없이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참으로 얄궂었습니다. 운명의 91시즌 91시즌이 시작되기 전, 히로시마의 미래는 장미빛이었습니다. 키타벳부, 사사오카, 오노, 가와구치(川口)는 당대 최고 철벽투수진의 근간이었고 타격에서도 유격수 노무라(野村)를 선두로 에토(江藤), 마에다(前田), 오가타 등의 젊은 피들이 은퇴한 카프의 대들보 들인 야마모토 고지와 기누가사 사치오가 빠져나간 자리를 성공적으로 메꾸어 주리라고 기대되고 있었습니다. (주1) 여기에 전년도 전력 외였던 츠다가 돌아온다면, 6년만의 우승도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장미빛으로 가득찬 91시즌이 시작되었고, 개막전 부터 츠다는 투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1점차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동점을 만들어주며 1이닝을 던진 후 마운드에서 내려옵니다. 이때만 해도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오랜만에 등판을 해서 컨트롤이 제대로 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며 위안을 합니다. 다음 경기에서는 수호신의 모습을 보여주겠지.. 하며 말입니다. 하지만 이틀 후 등판한 츠다는 결코 그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대 거인전, 키타벳부와 요시다의 팽팽한 투수전은 7회에 가서야 균형이 깨지고 2-1로 리드하고 있는 상황에서 츠다가 등판합니다. 당연히 관중석에서는 이제 이겼다는 탄성이 터져나왔습니다. 그러나.. 츠다는 그 탄성에 보답하지 못합니다. 사구와 안타를 연이어 맞은 츠다는 아웃카운트 하나 잡지 못하고 3실점하며 오노에게 공을 넘기고 패전투수가 됩니다. 벤치를 향한 츠다에게 야유와 비난이 쏟아지자 츠다는 입술을 깨문 채 머리를 숙이고 벤치로 들어갑니다. 이날 츠다는, 자신의 몸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전년도에는 부상당한 어깨 때문이려니 하고 생각했지만, 진정한 문제는 그가 원하는 대로 공이 뿌려지지 않는 다는 것이었습니다. 영문을 모르고 병원에 가서 정밀검진을 받은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뇌종양, 그것도 이미 손을 쓰기 힘든 말기였습니다. 너무나도 쇼킹한 뉴스에 구단과 츠다의 아내 아키요는 경악했고, 일단 츠다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은 상태에서 수술을 받게 하도록 하자는데 동의합니다. 병명을 모르고 수술실에 들어가는 츠다는 그의 인생 처음으로 ‘무섭다’는 말을 연발하기 시작합니다. 대수술은 일단 성공적이었으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방사선 치료와 항암 치료를 포함한 긴 투병생활을 시작합니다. 투병 생활 심한 두통으로 몸부림치던 츠다에게 더욱 두려웠던 것은, 그 자신의 병명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병원에서 그에게 해준 말은 수두염의 일종이라는 어중간한 답변뿐. 아무리 아내를 다그치고 의사에게 매달려도 그 이상의 답변은 얻을 수 없었습니다. 수두염 따위로는 이렇게 아플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고 병세는 악화되기 시작하여 결국 재수술을 해야만 했습니다. 재수술의 결과는 더욱 심한 통증이었습니다. 견디기 힘든 통증에 미친 듯이 괴로워하던 츠다는 3일이 지나서야 눈을 붙일 수 있었고 잠에서 깨어난 츠다는 ‘무엇 때문에 나만 이렇게 아파야 하는 것인가’ 라고 외치며 그의 아내 아키요의 품에 안겨, 생애 처음으로 펑펑 울었습니다. 너무나 괴로워하던 츠다를 보다 못한 그의 아내 아키요는 식이 요법을 사용해 보기로 마음을 먹고 주치의를 방문, 항암제나 방사선 치료를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전달합니다. 6월 12일, 마침내 츠다는 병원에서 퇴원하였고 집에서 통원 치료와 식이 요법을 병행하며 치료를 해나갑니다. 불안에 휩싸인 츠다는 도대체 자신의 병명이 뭐냐며 아내를 다그쳤고, 그의 아내 아키요는 2주일이 지난 뒤, 마침내 그의 병명을 알려주게 됩니다. 뇌종양. 불치의 병. 말기. 엄청난 쇼크를 받은 츠다는 ‘이제 나는 죽는 것인가?’ 라고 뇌까리며 아이와 같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키요는 같이 눈물을 흘리며 충격을 받은 츠다를 격려합니다. 아내의 헌신적인 간호에 감동을 받은 츠다는 자신의 행동을 진심으로 사과하고 그때까지 그를 지탱해왔던 불굴의 투지로, 병마와 싸울 것을 다짐합니다. 결사적으로 식이 요법에 매달리던 츠다의 두통은 가라앉는 듯 했으나 7월 19일, 갑자기 상태가 급변합니다. 중태에 빠진 츠다는 병원에 입원합니다. 하지만 고비를 넘기자, 식이요법의 효과가 발휘되어서 였는지 기적적인 회복을 보입니다. 9월 17일, 믿어지지 않게 도움 없이 혼자 앉게 된 그는 다음날 침대에서 일어났고 그 다음날에는 걷기 시작했습니다. 히로시마 카프가 우승이 결정된 날, 그는 어린아이처럼 손뼉을 치며 기뻐했습니다. 같이 싸운다, 츠다! 츠다의 병명이 알려진 후, 히로시마 선수단은 초상집 분위기나 다름없었습니다. 히로시마에서 츠다의 존재는 단순한 마무리 투수 이상이었습니다. 선발투수 들은 그를 보며 7회까지만 버티자는 생각을 했고, 타자들은 그와 같은 팀이라는 것을 하늘에 감사했습니다. 신인들은 그를 우러러 보았으며 베테랑들은 그를 믿었습니다. 츠다가 투병 중이란 것을 알게 되자 팀원들은 그와 같이 싸울 것을 다짐했습니다. 츠다의 빈자리에는 츠다와 제일 친한 투수였던 오노가 들어갔습니다. 마무리 투수를 맡게 된 오노는 히로시마 시민구장 불팬 내, 츠다가 주로 서있던 자리에 플레이트를 걸어놓았고, 등판할 시기가 되면 꼭 그 플레이트에 손을 대고 난 후에 경기에 나갔습니다. 츠다를 동경하던 사사오카는 엄청난 투지를 보이며 사와무라상을 받아 그 해 최고의 투수가 되었습니다. 츠다와 어깨를 마주하며 던지던 키타벳부와 가와구치는 선발진을 맡아가며 팀을 이끌어 나갔고, 타선에서는 츠다와 생사고락을 같이한 다쓰가와가 눈물을 흘리며 뛰고 있었습니다. 시즌 종반, 마침내 주니치를 따라잡은 히로시마는 홈구장에서 역전 우승을 달성합니다. 감독의 헹가레를 끝낸 후, 그라운드에서 벌어진 우승 축하연에서 다쓰가와는 눈물을 머금고 외칩니다. ‘츠다… 해냈어!’ 곧 모든 선수들이 다쓰가와를 따라 외치기 시작했고 팀 전원은 하늘을 향해 손을 들며 츠다에게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분발해줘, 츠다!’ 일본시리즈에서, 그 없이 세이부와 싸우고 있는 히로시마를 보던 츠다는 아내에게 말합니다. ‘여보, 감독이나 코치에게 욕을 먹고, 관중들에게 어떠한 야유와 비난을 받아도 좋으니, 한번만, 다시 한번만 마운드에 설 수 있으면 좋겠어.’ 싸움의 끝 11월 6일, 히로시마 구단은 충격적인 발표를 합니다. -히로시마 카프 구단은 마무리 투수 츠다 츠네미 선수를 방출합니다- 모든 스포츠 신문들은 다음날 1면 톱기사로 불꽃의 마무리 투수의 은퇴를 발표했고 츠다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곧 그의 인생을 좌우한 오기와 투지가 불타올랐고, 단순히 ‘살아 남는다’였던 그의 목표는 ‘연봉따윈 필요없다. 다시 한번 히로시마의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서고 싶다’로 바뀌었습니다. 긴 겨울이 지나고, 92년 새해가 되자, 츠다는 마침내 그토록 그립던 공을 잡습니다. 그의 세살난 아들의 캐치볼 상대가 된 츠다는 공을 받게 되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와인드업을 하고 공을 던져버립니다. 아들의 옆으로 날아간 것은, 놀라운 속도의 강속구였습니다. 벙쩌버린 아들, 경악한 츠다, 그리고 누구보다 기쁨에 찬 그의 아내 아키요. 이젠 정말 할 수 있다고 마음먹은 츠다는 본격적으로 트레이닝에 들어갑니다. 복귀를 목표로 트레이닝을 하던 츠다에게 이상이 생긴 것은 6월. 그의 말수가 감소하고, 얼굴이 고통에 차기 시작했습니다. 기억력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8월에는 다시 병원에 입원해야 했습니다. 9월이 되자 말을 할 수 없게 되었고 10월에는 의식을 잃었습니다. 식물인간 상태로 7개월을 버텼으나 다음해 5월 호흡정지. 7월 19일, 생명유지 장치에 힘입어 살아있던 그에게 아내 아키요가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여보, 이제 편해지셔도 되요. 그 동안 노력해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7월 20일 오후 2시 45분. 츠다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향연 32세였습니다. 그 후… 천재는 요절한다는 말이 사실이었을까요? 너무나도 일찍 세상을 떠난 츠다를 보며 다쓰가와와 오노를 비롯한 히로시마 팀원들은 오열했습니다. 팬들은 눈물을 흘렸고, 앞으로는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을, 그런 선수가 떠나갔다는 것에 대해 야구계 전체는 슬픔에 빠졌습니다. 그가 죽기 전인 93년 4월, 그의 고향이었던 신난요시는 츠다를 신난요시 시민 영예상 1호로 발탁하고, 그를 기리기 위한 작업을 착수합니다. 시청 로비 한쪽에는 지금도 츠다 선수가 입고 있던 유니폼과 글러브, 스파이크등을 영구 보존하고 있습니다. 츠다의 모교였던 와다 중학교에서는 야마모토 고지 감독의 친필이 담긴 ‘직구인생’이라는 기념비가 만들어 졌습니다. ![]() 그의 비운의 삶은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을 울렸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더 기억에 남게 됩니다. 그의 아내가 투병 당시 쓰던 일기를 모아서 출판한 ‘최후의 스트라이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NHK에서는 ‘다시 한번 던지고 싶었다’라는 제목으로 그의 삶을 재 조명했습니다. 그의 7번째 기일 직후인 2000년 7월 28일에는 후지TV에서 ‘최후의 스트라이크 - 불꽃의 스토퍼 츠다 츠네미의 사랑과 죽음을 응시한 직구인생’이라는 제목으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히로시마의 팬들은 아직도 츠다를 기억합니다. 히로시마 카프 게시판에 무명으로 이런 글이 올라와 있습니다. 츠다의 14번이 영구 결번이 아닌 것은,천국에 올라간 츠다를 신격화하는 대신,그 영혼을 모두에게 계승하기 위해서 입니다. 히로시마 시민 구장이 돔구장이 되지 않는 이유는,츠다가 천국에서 언제라도 시합을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마무리 투수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분야 중 어느 면에서도 츠다는 최고가 아니었습니다. 직구 스피드에서는 스즈키보다 못했고 공의 무거움에서는 야마구치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천재성에는 에나츠를 능가하지 못했고 우시지마처럼 다양한 변화구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실적으로는 가쿠 겐지에게 밀리고 기록에서는 사사키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안정감에서는 선동열 뒤에 있고 전천후성으로는 오노와 경쟁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츠다에게는 이 모든 선수들을 능가했던 열정이 있었고 그 누구와도 정면승부를 할 수 있던 배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어떠한 다양한 변화구도 제압할 수 있는 불꽃의 직구가 있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야구 경기를 한다면, 그리고 그 경기가 1점차 9회 말 2사 만루까지 갔다면, 전 망설임 없이 츠다를 선택할 것입니다. 물론 실패할 수도 있을 것이고, 사사키나 선동열을 믿어보는 것이 더 성공확률이 높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츠다라면, 다른 ‘투구기계’ 들이 아닌 ‘사나이 츠다’ 라면, 적어도 내 목숨을 한번 걸어 볼만한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 ![]() 에필로그 2000년 7월 20일. 히로시마 시민구장에서는 카프의 홈 경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습니다. 경기 시작 전, 시구식을 준비하는 구단 직원들의 얼굴은 경직되어 있었고, 벤치의 다쓰가와 감독과 카프 선수들의 눈은 떨리고 있었습니다. 영문을 몰라 하는 관중들을 향해 스피커에서는 난데없이 선수교체의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히로시마 카프 투수 교체입니다. 투수, 츠다. 등번호, 14…’ 경악하는 관중들. 츠다의 기일에 이 무슨 불경스러운 일인가라고 외치던 관중들의 눈에 불펜에서 힘차게 뛰어나오는 한 소년의 모습이 들어왔습니다. 그의 빨간 카프 유니폼 등에는 분명 츠다. 14번이라는 글씨가 커다랗게 쓰여있었습니다. 상황을 짐작한 관중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마운드에 서있는 소년은 이제 열한살이 된 츠다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늠름한 모습의 소년은 멋진 와인드업을 한 후 포수의 글러브를 향해, 아버지가 그토록 던지고 싶어했던 강속구를 던졌습니다.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카프의 팬들은 믿고 있습니다. 카.프.매.니.아. 뽀레 ![]() 타이틀 82 신인왕, 83 최고승률(.750), 89 최우수구원(40sp) (주1) 91년도 히로시마 카프의 투수진은 역대 카프의 투수진중 손꼽힐 정도로 강하다는 것이 대다수의 의견입니다. 2년차로 완벽한 모습을 보이며 MVP, 사와무라상, 투수부문 베스트나인, 다승, 방어율 타이틀을 따낸 사사오카 신지를 필두로 승률 타이틀의 키타벳부, 구원 타이틀의 오노, 탈삼진 타이틀의 가와구치 등 센트럴리그 투수부문 타이틀을 카프 투수진이 독식했습니다.
Prologue
1986년 10월 12일. 센트럴리그 우승까지 1승만을 남겨두고 있던 히로시마는 메이지 진구 구장에서 야쿠르트와의 원정 경기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1회에 나가시마 (長島淸幸)의 만루 홈런이 터지는 등, 시합은 완전히 히로시마의 페이스.선발 투수인 히로시마의 에이스 키타벳부 (北別府學)도 쾌조의 투구를 보이며 8대3으로 리드하고 있던 상황에서 9회말 야쿠르트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이 때 덕아웃에서 키타벳부는 글러브를 챙겨주는 감독에게 말을 꺼냅니다. ‘교체해 주십시오.’ 의아해 하는 아난(阿南)감독에게 설명하는 키타벳부. ‘츠네를 헹가래 투수로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감독. 부상에 시달리던 시즌들을 극복하고,팔이 빠져라 던지면서도 피곤한 척 한번 하지 않았던 츠다의 모습을 선수단 모두가 알고 있었기에, 반대 의견을 내세우는 자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 ‘구원투수 14번, 츠다 츠네미’ 장내 아나운서의 방송이 이어지자 관중들은 열광하기 시작합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타자를 질려버리게 할 정도로 윽박지르는 직구승부. 몇 개인가 직구가 연달아 들어왔고 우승을 결정짓는 마지막 직구가 포수 미트를 향해 돌진했습니다. 그 불을 뿜는 직구는 외곽으로 크게 벗어나는 볼. 하지만 질려버린 주심은 엉겁결에 손을 들어버리고 맙니다.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눈물을 흘리며 뛰어나온 포수 다쓰가와(達川光男) 의 품에 안긴 츠다는 꿈 같은 86년 시즌을 마칩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는 전설이 되었습니다. ![]() 비운의 선수 우리나라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비운의 선수는 누구일까요? 프로야구 원년을 불태운 후 잦은 부상으로 끝까지 원래의 실력을 찾지 못했던 불사조 박철순, 투타겸업에 따른 혹사와 부상으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져버린 우리나라 첫 아이돌 스포츠 스타 박노준, 18승으로 신인왕을 따내고 화려한 경력을 막 시작하려는 참에 교통사고로 인해 투수의 꿈을 접어야 했던 김건우, 앞으로 10년은 팀을 책임질 대들보로 여겨지다 급작스러운 위암으로 사망한 김상진, 만개하는 듯 하다가 당뇨라는 병마에 사로잡혀 투병생활과 선수생활을 겸임하고 있는 심성보. 이 외에도 많은 선수들의 이름이 떠오를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 프로야구에서 비운의 선수를 들라면, 사람들은 너무나 생생한 기억에 진저리를 치며 한 선수를 첫머리에 꼽습니다 – 80년대 히로시마 카프의 마무리 투수, 츠다 츠네미 (津田 恒美) 입니다. 일명 ‘불꽃의 스토퍼’ (Stopper: 마무리투수)라 불리며 ‘오직 직구!’를 외친 츠다 선수. 93년 7월 20일 뇌종양으로 인생을 마무리할 때까지 ‘한번만 더 공을 던지고 싶다!’라고 외치던 그런 선수가 바로 츠다였습니다. 사나이 츠다의 인생, 한번 되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화려한 젊은 시절 츠다는 1960년 8월 1일, 야마구찌현(山口縣)신난요시(新南陽市)와다(和田)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시절부터 야구에 소질을 보였던 그는 난요(南陽)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야구부에서 활약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그가 전국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2학년이던 77년 7월 21일, 고시엔(甲子園) 대회 지역예선 1회전에서 완전시합 (Perfect Game)을 달성하면서부터 였습니다. 3학년이던 78년도에는 봄, 여름 고시엔 대회에 연속 출장하여 에이스로 활약하며 관서(關西)의 에가와 (江川卓 – 드래프트 파동의 주인공. 요미우리의 에이스)라고 불리며 프로구단의 지목대상이 되기 시작합니다. 어린시절 그는 조용한 성격의 아이었습니다. 공은 빠르지만 경기에만 출전하면 당황하여 제 성적을 내지 못하여 새가슴이라고 불리기도 하던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것은 3학년 고시엔 대회. 당시 우승후보로 불리던 난요공고는 에이스였던 츠다가 별 생각 없이 던진 단 한번의 실투의 결과로 2회전에서 탈락하게 됩니다. 눈물을 흘리며 후회한 츠다는 이때부터 ‘약한 마음은 최대의 적이다’라는 말을 그의 좌우명으로 삼고 진정한 승부사로 거듭나기 시작합니다. 1점 차이의 긴박한 승부에도, 10점 이상 차이 나는 압도적인 승부에도 변함없는 집중력을 보여주었던 그의 승부사 기질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졸업 후 교화(協和) 발효 사에 들어가 사회인 야구에서 활약하던 그는 프로 팀의 구애에 시달리다 결국 81년도 드래프트에 참가하게 되고 히로시마 카프에 의해 1차 지명으로 뽑히게 됩니다. 모든 구단이 노리던 강속구 파워피처를 손에 넣은 히로시마는 미친 듯이 기뻐했고 구단 사상 최초로 신인왕을 노려보겠다는 야심을 가지게 됩니다. 당시 키타벳부, 후쿠시 (福士敬章 = 장명부), 야마네 (山根和夫), 이케다니 (池谷公二郞), 오노 (大野豊) 등 5명의 10승대 선발진을 보유했던 히로시마였지만 촉망 받는 신인 츠다에게는 선발 한자리가 보장되었고 츠다는 구단의 기대에 완벽하게 보답합니다. 무너져버린 후쿠시와 이케다니의 공백을 메워주며 에이스 키타벳부에 이어 팀 내 다승 2위, 11승 6패 방어율 3.88을 기록하며 구단 첫 신인왕을 따내는데 성공합니다. 직구만을 고집하는 그의 승부자세와 불 같은 투지는 순식간에 관중들을 사로잡았고, 사람들은 그를 ‘츠네곤’ 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팬클럽을 결성하는 등 많은 사랑을 보냅니다. 히로시마 역사상 가장 화려한 첫해를 보낸 신인이었지요. 신인시절이 끝나고 2년차가 되었지만 그에게 그 흔하디 흔한 2년차 징크스는 없는 듯이 보였습니다. 전반기 내내 한단계 업그레이드된 실력을 선보인 그는 9승 3패 방어율 3.07이라는 화려한 성적을 보이며 배터리인 다쓰가와와 함께 첫 올스타 게임에 출전하여 우수선수상을 수상합니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거둔 화려한 성공을 하늘이 질투했던 것일까요. 올스타 경기에서 호투한 다음부터 츠다는 어깨에 뻐근한 통증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별일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도 잠시, 어깨 부상이라는 의사의 진단이 내리면서 그의 화려한 젊은 시절도 막이 내립니다. 악전고투 강속구 투수들의 경우 어깨부상은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컨트롤보다는 스피드에 의존해 타자를 힘으로 누르는 파워피처들은 어깨부상 이후 공의 스피드가 떨어지면 타자들을 상대할 가장 강력한 무기를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스피드를 잃은 강속구 투수들이 그저 그런 투수가 되어 쓸쓸히 야구판을 떠나게 되는 광경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84년 츠다가 3승 4패 1세이브 방어율 4.64에 그치는 참담한 성적을 내자 많은 야구팬들과 평론가들은 츠다도 이제는 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더군다나 시즌 중, 그가 어깨부상이외에도 오른손중지에 혈액순환장애를 앓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투수생명은 이제 끝이라고 단정짓게 됩니다. 이상훈 선수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유명해진 혈액순환장애는 과도하게 팔을 사용하는 투수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병 중 하나로 무리한 운동을 하면 특정부위가 부어 오르기 때문에 한계투구가 20~30개 정도로 제한이 되게 됩니다. 지금이야 어느 정도 치료법도 개발이 되어있고 재기에 성공한 선수들도 있지만 당시에는 이병은 투수생명의 끝을 확정 짓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때까지 혈액순환장애에 걸리고도 성공적으로 투수생활을 연장한 선수는 단 한명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즌 종료 후, 츠다는 커다란 결심을 하게 됩니다. 혈액순환장애를 수술해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 방면의 수술은 걸음마 단계였고 일반인에 대한 성공결과는 있었으나 투수로서 수술을 받는 경우는 츠다가 세계 최초였습니다. 성공 가능성은 극도로 낮았으나 이렇게 투수생활을 연명하느니 차라리 도박을 걸어보겠다는 사나이 츠다는 과감히 승부수를 던집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으나 결과가 투구에 미치는 영향은 아무도 모르는 상태. 물음표를 단 채85년 시즌은 시작했습니다. 재기의 의욕에 불타 등 번호도 15번에서 14번으로 변경한 츠다는 이름도 츠네자네(恒實)로 바꾸며 한 시즌을 불태울 각오를 합니다. 하지만 결과는 실망적이었습니다. 2승 3패의 승률에 방어율은 6점 대를 훌쩍 뛰어넘는 최악의 성적이 나온 것입니다. 겨우 42이닝 만을 던지며 어깨가 꺾인 츠다. 통증은 여전했고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강속구는 힘을 잃은 지 오래 였습니다. 다른 수많은 유망주처럼, 그도 그렇게 사라지는 듯 했습니다. 화려한 부활 85년 겨울캠프, 더 이상 부진하면 바로 방출될 지도 모른다는 벼랑 끝에 놓인 츠다는 그의 야구 인생을 걸고 훈련을 하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노력을 때늦은 짓이라며 무시했지만 그의 노력을 눈 여겨 보던 사람이 한명 있었습니다. 당시 히로시마를 이끌던 아난 감독이었습니다. 86년 개막전인 대 주니치전. 5 대 0으로 앞서가던 7회초, 호투하던 에이스 키타벳부 선수가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한 시즌의 3대 이벤트에 들어가는 개막전이니 만큼, 팀으로서는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경기였고, 그래서 츠다를 포함하여 경기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당시 마무리 투수였던 고바야시 (小林誠二) 선수가 등판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아난 감독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바로.. 츠다였습니다. 놀람 반 감격 반으로 마운드에 오른 츠다는 그의 야구인생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경기에서 팔이 빠져라 역투를 합니다. 그리고, 그의 등판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모든 사람들을 잠재우는 150km의 직구를 연신 찍어대며 전업 마무리 투수로서의 첫 세이브를 기록합니다. 앞으로 너무나 많이 보게 될 장면의 서곡처럼 말입니다. 그토록 원하던 기회를 잡은 츠다의 역투는 전반기 내내 계속되었고 츠다는 부상에서 돌아온 초보 마무리투수 답지 않게 리그 정상급 실력을 보여주며 모두를 놀라게 합니다. 그의 전반기 성적은 3승 4패 12세이브. 28시합에 등판하여 단 6번의 구원실패 (Blown Save) 만을 기록하였고 방어율은 무려 0.93이었습니다. 그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묵직한 직구만을 찍어대는 그의 모습은 히로시마 팬들에게는 흔들림 없는 청동거인과도 같았고 상대팀에게는 지옥의 수문장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당시 츠다의 직구 위력에 대한 두 가지 만화 같은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힘으로 승부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줬던 츠다의 위력에 많은 타자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가던 86년 9월 24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4번 타자인 하라(原辰德)가 츠다와 맞대결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선두를 놓고 반경기 차로 엎치락 뒤치락 하던 히로시마로서는 절대 놓칠 수 없는 경기였습니다. (주1) 9회 2사 1루. 1점차이니 만큼 장타 하나면 동점이 되는 상황에서 츠다는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고 2구째를 던졌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구질은 직구. 조금 늦게 알아차린 하라의 한 템포 늦은 풀 스윙. 공은 배트 안쪽에 맞았고 3루수 앞으로 힘없이 굴러갑니다. 잽싸게 공을 잡은 3루수가 1루로 공을 던졌지만 1루에는 당연히 뛰어와야 할 타자가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타자였던 하라는 타석에서 뒹굴고 있었지요. 믿거나 말거나, 츠다의 공에 배트가 밀려 타자의 손목이 부러져 버린 것이었습니다. 데드볼이면 모를까, 투수의 공을 때린 타자, 그것도 장타력 최강의 4번 타자가 공을 때려 손목이 부러졌다는 것은 정말로 만화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85년도 우승팀으로 ‘홈런 200발 타선’을 자랑하던 한신의 클린업 트리오와 상대했을 때도 진정 강함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습니다. 전설의 백스크린 3연발의(주2) 주인공인 바스 (Randy Bass) – 가케후(掛布) – 오카다 (岡田)와의 대결에서 츠다는 단지 공 9개만으로 이닝을 끝내버립니다. 세명 모두 삼구 삼진으로 말입니다. 단지 직구만을 우겨넣어서 이루어낸 결과이기에 사람들은 더욱 경악을 금치 못했던 것이지요. 전반기의 그의 성적은 매스컴들이 온갖 수식어를 붙여대며 찬사를 해댈 정도였고, 결국 그는 그의 생애 두번째 올스타전에 출전하게 됩니다. 첫번째 올스타전에서 활약한 것처럼, 큰 무대에서 더욱 빛나는 그의 실력은 당시 세이부 라이온즈의 슈퍼루키 기요하라 (淸原)를 삼진으로 잡으며 절정에 이릅니다. 통증이 없어졌다는 마음에 너무 무리를 한 탓 일가요? 후반기에 그는 피로에 쌓여 전반기 만큼의 실력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부상경험이 있는 초보마무리에게는 소화해내기 힘든 이닝 수였기 때문입니다. 전반기 방어율은 0.93이었지만 후반기 방어율은 3.52였습니다. 수호신이 흔들리게 되자 팀도 부진을 거듭하게 되고 결국 8월 3일, 그때까지 아무도 넘보지 못하게 지켜오던 선두자리를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하지만 츠다는 역시 츠다였습니다. 계속되는 연투에도 단 한마디 불평도 하지않은 채, 그는 팀을 위해 던지고 또 던졌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한 그의 투구 덕인지 다시 정신을 차린 히로시마는 9월 23일 선두자리를 회복하고 시즌이 거의 끝나가던 10월 12일, 야쿠르트와의 경기에서 우승을 확정 짓습니다. 앞에서 나왔듯이, 당시 선발이었던 키타벳부는 츠다를 헹가래 투수로 만들어주기 위해 자진 강판을 합니다. 경기 후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올해의 끝은 지난 몇 년간 고생만 해온 츠다에게 맡기고 싶었습니다. 시즌 전반 팀을 혼자 이끌어가다시피 한 그의 힘이 없었다면, 올해의 우승은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신인왕을 따낸 데뷔시즌이후 4년 만에 부상 없이 한 시즌을 보낸 츠다에게는 ‘올해의 컴백상’(주3)이 수여됩니다. 이 해 센트럴리그를 우승한 히로시마는 일본시리즈에서 아키야마(秋山)-기요하라의 ‘AK포’를 앞세운 세이부 라이온즈와 맞붙게 됩니다. 첫 경기 2-2무승부 이후 계속된 2-1, 7-4, 3-1의 3연승. 이긴 경기마다 모조리 등판하여 승리를 지켜낸 츠다에겐 너무나도 장미빛인 미래가 보이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호사다마였을까요. 제 5차전에서 키타벳부를 구원한 츠다는 연장 12회말, 상대투수 구도(工藤)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고 1-2 패배를 맞보게 됩니다. 6, 7차전을 연거푸 1-3으로 진 히로시마는 일본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벌어진 일본시리즈 8차전에서 2-3으로 역전패를 하면서 우승의 꿈을 접고 맙니다. 통한의 안타하나로 무너지긴 했지만 츠다의 공로는 모두가 인정하여 일본시리즈 우수선수로 뽑히게 됩니다. 불꽃의 스토퍼 87년 시즌도 주전마무리로 꾸준한 성적을 보여준 츠다였지만, 88년 시즌에는 여러모로 아쉬운 모습을 보이며 무려 9패를 기록합니다. 당시 매스컴에서는 그를 ‘사요나라의 츠다’라고 부르며 놀려대곤 했습니다. 89년 언제나 그를 믿어주었던 아난 감독이 물러나고 한때의 동료였던 히로시마의 영원한 4번타자 야마모토 코지(山本浩二)가 감독으로 취임하자 츠다의 자리도 위협을 받기 시작합니다. 츠다의 불안한 마무리를 걱정한 야마모토 감독은 시즌 초에 더블스토퍼 체제를 고려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무너진다면 츠다가 아니지요. 이러한 조치를 오히려 분발하는 계기로 삼은 츠다는 그 어느 때보다 위력적인 공을 뿌려대며 부활합니다. 기합에 가득찬 정면승부. 불을 뿜는 강속구. 팬들은 어느새 그를 ‘불꽃의 스토퍼’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해 츠다는 고대하던 구원왕 자리에 오릅니다. 12승 5패 28세이브. 무려 40세이브포인트에 일본 기록인 12연속 세이브, 20이닝 연속 무실점까지 기록한 결과였지요. 그러나... 츠다의 영광은 거기까지였습니다. ![]() (주1) 이 해 히로시마는 거인과 우승을 놓고 마지막 사투를 벌이다 10월 12일에야 우승을 확정 짓습니다. 다시 선두자리를 뺏어서 우승을 위한 매직넘버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날은 바로 전날인 23일. 24일 경기는 히로시마로서는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경기였습니다. (주2) 백스크린 3연발은 한신 타이거즈 팬이라면 절대로 잊을 수 없다는 대사건입니다. 1985년 4월 17일. 대 거인전 3연전중 2회전. 3대1로 패색이 짙던 7회말 공격에서 거인의 에이스 마키하라의 공을 3번타자 랜디 바스가 통타, 백스크린(전광판)을 직격하는 시즌 1호 3점 역전홈런을 때려냅니다. 이어 타석에 들어선 가케후도 가볍게 풀스윙, 역시 백스크린을 직격하는 시즌 2호 솔로홈런. 마지막으로 오카다 까지 백스크린을 직격하는 시즌 1호 솔로홈런을 때려버립니다. 한신 팬들은 너무나 흥분해서 거의 폭동수준이었답니다. (주3) 부상 등으로 제대로 성적을 올리지 못하다 다시 부활한 선수에게 주는 상. 삼성에서 뛰다 다이에로 돌아가 뛰어난 성적을 기록한 김일융 선수도 이 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1945년 8월 6일. 날씨 맑음. 히로시마 시내에는 공습경보가 울리고 있었습니다. 시민들은 벌써 며칠째 계속되는 공습에 질린 터라 서둘러 대피소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공습은 조금 달랐습니다. 이놀라 게이 (Enola Gay) 에서 떨어진 우라늄 235 폭탄 한발은, 히로시마를 잿더미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대피소도 소용이 없었고, 히로시마 시내는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34만 3000명의 인구중 약 7만 명이 사망, 13만 명이 부상당했으며 완전 연소 되거나 파괴된 가옥 6만 2000호, 반파된 가옥 1만 호, 10만 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역사상 유래가 없는 재난이었고, 삼일 후 역시 원폭의 피해자가 되는 나가사키와 비교해도 세배 이상의 피해였습니다. 원폭의 위력에 놀란 일본 정부가 열흘 후 무조건 항복을 외치면서 태평양 전쟁은 끝이 납니다. 하지만 히로시마 시민들에게는 이미 어떠한 희망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1949년, 일본 프로야구는 그때까지 유지해 왔던 단일 리그 제도를 폐지하고 양대 리그 제도를 도입하게 됩니다. 현대 일본야구의 기틀이 마련해 지는 중대한 시기였지만, 폐허가 된 도시에서 당장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히로시마 시민들에게는 프로야구는 먼 꿈나라와도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히로시마에는 이러한 꿈을 이루어 내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리그가 분열되게 되면, 자연히 더 많은 팀이 필요하게 된다. 우리 히로시마에도 프로야구 팀을 만들어 보자!’ 라는 생각을 해낸 사람은 사업가였던 야마구치(山口) 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업상의 이유로 프로야구 연맹과 거북한 사이였기 때문에 대타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야마구치는 당시 전쟁 중에 내무성 경보 국장이었다는 이유로 추방당해 낙향해 있던 전 국회의원 타니가와 노보루(谷川 昇)에게 그의 생각을 말하고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타니가와는 일단 거절하였으나, 아들의 책상에서 프로야구 선수들의 브로마이드를 발견하고는 ‘패전 후 일본에 살고 있는 학생들의 꿈이 무엇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원폭으로 상처를 받고 재건되지 않는 그의 고향에 프로야구 팀이 생긴다면 적어도 히로시마 시민들이 꿈을 가지고 동경할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타니가와는 마음을 정하고 히로시마에 야구단을 창설하는데 그의 모든 것을 투자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세번째 조력자는 의외의 곳에서 나타났습니다. 당시 쥬고쿠 (中國) 신문사 도쿄지사의 통신 부장이었던 가와구치(河口)는 도쿄를 방문한 타니가와를 만난 자리에서 그의 사고 자체를 뒤흔들어 놓을 수 있는 말을 듣게 됩니다. ‘기업의 선전대로서의 프로 구단이 아니라, 연고지와 사람들의 이익으로 지탱해 가는 구단을 만들고 싶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이념에 감동한 가와구치는 직접 펜을 들어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잉어처럼 힘차게 뛰어라는 의미로 ‘카프(Carp)’라는 이름을 작명하고 다음날 쥬고쿠 신문에 시민들의 협조를 요청하는 기사를 씁니다. 사실 이러한 이념의 배경에는 어쩔 수 없는 현실도 작용하였습니다. 원폭으로 인해 산업 기반 자체가 무너져버린 히로시마에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프로야구 구단을 유지할만한 대기업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히로시마에 프로야구 단이 창설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힘을 모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12월 3일에 준비위원회가 설립되었고 5일에는 히로시마 상공회의소에서 ‘히로시마야구클럽’ 설립 준비위원회 발회식이 거행되었습니다. 회장에 취임한 타니가와는 취임연설에서 ‘카프는 한사람의 것이 아니라 시민 모두의 것입니다’라고 말했고 직접 문패에 ‘카프’라는 문자를 써넣으며 결의를 다지게 됩니다. 시민들의 반응은 뜨거웠고 준비위원회 사람들의 가슴은 불타오르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타니가와와 가와구치는 생업은 포기하다시피 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 당국과 지방 자치단체를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반응은 호의적이었으나, 전후의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이름뿐인 팀에 투자해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목표로 했던 최소 모금금액은 2500만엔 이었으나 어렵게 모은 돈은 그 절반도 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선수들을 모으기는커녕 일본 야구연맹에 가입비조차 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연맹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가입금 납입을 연장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며 은행에는 무담보로 돈을 빌려달라고 생떼를 썼습니다. 관심을 보이는 기업이 있다는 소리가 들리면 득달같이 뛰어갔고 구두 한 켤레가 보름도 되지 않아 헤질 정도로 열성과 열의를 달하였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시민들은 ‘카프’라는 이름에 열광하였고 담보도 잡지 않고 기부를 해주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었는지, 결국 히로시마는 연맹에 가입비도 내지 않았고, 주식회사로 등록하지도 않은 상태였지만 1950년 시즌 참가를 일본야구 연맹으로부터 허락 받게 됩니다. 1950년 1월 15일. 현재 히로시마 현청 자리에 있던 서 연병장에서 꿈은 이루어졌습니다. 히로시마 야구클럽은 정식으로 결성되어 선수들과 감독, 시민들이 맞대면하였고 시민들은 ‘우리들의 카프’라고 외치며 탄생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감독으로는 히로시마 출신이며 전 쇼치쿠 로빈스 감독인 이시모토 슈이치씨가 선출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곳에도 타니가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타니가와의 활동이 선거 활동의 일부라고 의심한 법무부 심사국에서 타니가와에게 그에게 내려진 추방령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며 손을 떼라고 협박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카프의 아버지였던 타니가와는 어쩔 수 없이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카프에서 손을 떼게 됩니다. 타니가와는 다음해 추방이 해제되었고 정계로 복귀했으나 1955년 2월, 세번째 당선 직후 병으로 급사했습니다. 카.프.매.니.아. 뽀레 ![]()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미루던 짓, 드디어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얼마나 갈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일단 한번 질러놔야 자극이 올것 같아서요. ㅡ.ㅡ; 이 블로그는 일본야구에 대한 정보/분석으로 꾸려나갈 생각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제가 히로시마 카프의 팬이므로 카프 이야기가 메인이 되겠지요. 그럼 오픈합니다. 행운을 빌어주시길. -_-)/ |